최악의 금융공황이 낳은 연준, 위기 거치며 ‘공룡 권력’으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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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7호 20면

1910년 11월 조지아주의 한적한 휴가지 지킬(Jekyll)섬. 워싱턴과 월가의 거물 7명이 신분을 위장한 채 스며들었다. 비밀 회동을 소집한 건 공화당 출신의 당대 최고 정치가 넬슨 올드리치 상원의원. 그의 뒤엔 월가의 황제 존 피어폰트 모건(JP모건)이 버티고 있었다. 9일 동안 이어진 비밀 회합에서 7인이 구상한 건 미국 중앙은행 청사진이었다.

‘달러의 신전’ 美 Fed, 어떻게 탄생했나

1907년 최악의 금융 공황을 겪은 뒤 중앙은행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JP모건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중앙은행은 설립하되 그 통제권은 은행가의 손안에 두는 모델을 구상했다. 그러나 1912년 남부 지지를 업은 민주당 출신 우드로 윌슨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JP모건의 구상은 암초를 만났다. 농업을 기반으로 한 남부 정치인들은 중앙집권화한 금융권력이 결국은 중상주의 북부만 살찌울 거라며 중앙은행 설립에 제동을 걸었다. 특히 윌슨은 중앙은행을 은행가의 손에 넘겨주는 데 질색했다.

1913년, 난전 끝에 탄생한 건 머리와 팔·다리를 분리한 미국만의 독특한 ‘반관반민(半官半民)’ 중앙은행 제도. 통화정책을 결정하는 머리이자 중앙은행 격의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워싱턴에 뒀다. 7명의 FRB 이사는 대통령의 지명과 상원의 인준을 받는 임기 14년의 준공무원 신분이다. 이와 달리 화폐 발행과 민간은행과의 거래를 담당하는 팔·다리 격인 연방준비은행은 12개 지역으로 쪼갰다. 전국 영업 면허를 가진 민간은행이 지분을 보유한 지역 연준의 총재도 주주가 뽑는다. 월가의 입김이 작용한다는 얘기다.

월가의 사익과 의회의 공익은 이후로도 충돌했다. 애초 연준 이사회엔 재무부와 농업부 장관이 포함됐다. 북부와 남부의 이해를 절충하기 위해서였다. 한데 1930년대 대공황으로 월가의 기세가 꺾이자 의회가 공세를 폈다. 의회는 1935년 연준 개혁법을 통해 연준 이사회에서 정부 관료를 빼는 대신 공개시장위원회(FOMC)를 창설하고 통화정책 결정권을 FOMC로 넘겼다. FOMC는 7명의 연준 이사와 은행의 이익을 대변한 5명의 지역 연준 총재로 구성됐다. 수적인 면에서 월가의 입김이 더 약화된 셈이다.

그러나 연준의 힘은 갈수록 커졌다. 애초 연준의 역할은 금융위기 때 급전을 공급하는 소방수 역할로 국한됐다. 그러다 물가 안정이란 임무를 맡게 됐고 1930년대 대공황 이후엔 완전고용 달성이란 과제가 추가됐다. 1980년대 스태그플레이션을 겪은 뒤엔 장기금리 안정까지 맡았다. 2008년 금융위기 후엔 초대형 금융회사의 ‘대마불사’ 관행을 막기 위해 금융지주회사 감독권도 확보했다. 여기다 세 차례 양적완화 정책으로 4조 달러의 자산까지 보유한 ‘공룡 권력’이 됐다.

연준은 더 이상 미국만의 중앙은행이 아니다. FOMC는 ‘달러의 신전’으로 격상했다. 1년에 8차례 6~8주 간격으로 열리는 FOMC 회의엔 전 세계 금융시장이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힘이 강해질수록 연준의 선택지는 좁아졌다. 연준의 과격한 양적완화 축소가 신흥시장 외환위기를 부르고, 이것이 다시 미국 경기 회복의 발목을 잡는 ‘부메랑 효과’가 더 커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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