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등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언제부터인가 울려나오는 막내의 「피아노」소리에 문득 나는 배추 다듬던 손을 멈췄다 원래가 별로 예쁘지 못한 내 손이었으나 요즈음엔 갑자기 더 마디가 굵어지고 거칠어진 것 같다.
이제 어머니가 돌아가 신지1년-.연년생으로 4남3녀나 낳아서, 행여 하나라도 남에게 뒤질세라 열심히 가르치고 아끼시던 어머니. 자식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이 꾸며 놓으시려고 그토록 이나 고생하시더니, 아버지 말씀으론 이제 편안히 살만하니까 혼자 가버린 무던히도 복 없는 마누라란다.
꿈 많은 중학 시절에서,2년 남짓한 대학 생활에 이르기까지 「알프스의 하이디」에 반해서 나도 그처럼 주위에 행복을 뿌리는 소녀가 되리라고 다짐했었지. 밤을 새워 원고지를 메운 글이 학교 신문이나 교지에 실리면, 나보다도 더 좋아하시던 어머니…
끝내 참을 수 없어 터뜨리는 아버지의 오열과 넋두리, 그리고 제법 머리 큰 동생들의 통곡과, 영문모르고 따라 우는 막내 앞에서, 크게 부각돼오는 큰딸이라는 책임 앞에 슬픔을 삼켜야만했다.
『남을 두는 것도 자기가 할줄 안 후에』라는 평소 어머니의 교훈대로 그날부터 가정부마저 내보낸, 서투른 나의 안주인 노릇은 시작됐다.
엄마 없는 자식 티를 보일까봐, 부지런히 빨랫감을 쓸어모으고, 또 전에 어머니가 하셨던 것처럼 잊지 않고 동생들의 학교를 찾아본다 가끔 중단된 나 자신의 꿈이 아른거릴 때면, 쓸쓸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서글프지만, 동생들이 받아오는 상장과 성적표에 점수가 올라갔을 땐 ,울고 싶도록 찬란한 보람 속에서 옛날 엄마의 마음을 배운다.
다행이랄까, 모두 명랑하고 재주꾼인 동생들은, 남보다 앞장서서 자라고 우리 집엔 웃음과 노래가 그칠 새가 없다
다듬어진 배추를 소금에 절이며, 나는 문득 아직도 꺼지지 않은, 아니 영원히 꺼지지 않을 내 마음의 등불을 본다. <한정은(서울 동대문구 삼일「아파트」1동604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