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현실의 상호 망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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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한국 철학 회는 올해의 추계 발표회 주제로 『철학과 현실』을 다루었다. 사유하는 사람에 있어 구원의 주제라고도 할 수 있는 『철학과 현실』의 문제는 그러나 특히 오늘의 한국적 상황에서 절실한 의미 함축을 갖는 것처럼 여겨진다.
철학 회가 이 주제를 들고 나왔다는 사실 자체에 이같이 특수한 시대적·사회적 문맥에 대한 인식이 전제되고 있었으리라 추측되거니와 그러한 주제는 또한 철학을 전공으로 공부하지 않는 일반에 대해서도 관심을 촉발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왜 그럴까. 두드러지게 논의되고 있거나 혹은 어렴풋하게 느껴지고만 있거나 간에 아랑곳없이, 오늘의 한국적 상황에서 「철학과 현실」의 관계를 특징짓고 있는 것은 단적으로 말해서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요약될 수 있다. 즉 철학의 현실 망각이요, 현실의 철학 망각이 곧 그것이다.
한국의 철학은 동양 사상의 전승 형태에 있어서나 서양 철학의 수입 형태에 있어서나 아직까지는 그것이 다같이 한국의 주체적 현실에 뿌리박지 못한 공론이나 훈고학으로서 시종하고 있었다 해서 망발이 아닌 줄 안다. 그런 뜻에선 특히 한국에 있어서 철학이 현실에 대하여 호소력을 갖지 못하고 현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절반의 책임은 한국의 철학 또는 철학도 스스로가 져야 마땅하리라고 본다.
철학은 그 출발점이 현실 이의의 다른 곳에 있을 수 없고, 그 귀착점이 또한 현실 이외의 다른 곳에 있을 수 없다. 철학은 우리의 산 현실에 침잠하여 그를 개념적·논리적으로 재구성해서 인식의 조명을 비쳐 주는 것을 본의로 한다. 그러한 철학이 「현실의 고동」 「시대의 고동」을 듣지 못하고 한갓되이 「서적의 자동」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 철학의 「현실 망각·현실 상실」은 깊어만 가고 말것이다.
한편 현실의 철학 망각·철학 상실은 현대의 한국적 상황에서는 더욱 위기적인 징후가 짙다.
경제 발전을 제일의적 목표로 하고 있는 60년대 이후의 근대화 운동은 그 편의적 물질주의적 가치관의 강조로 해서 온갖 정신적·내면적인 가치 세계를 부차적인 것, 심지어는 전근대적인 것으로서 밀어 붙여버렸고, 경제 제일주의가 요구하는 성취동기·능률 본위는 온갖 원리적인, 또는 관조적인 가치 세계를 무용의 것으로 내동댕이쳐 버리는 기세에 있다.
이 같은 정신적·원리적 가치의 허무주의가 도사리고 있는 곳에서는 철학을 위장한 갖가지 사이비 사상이 깃을 펴게 마련이다. 철학 상실의 현실 속에 물욕과 이욕과 임기 미봉을 그럴싸한 이름으로 가식한 갖가지 거짓 철학의 독초는 꽃을 피운다.
더욱이 한반도에 있어서는 아직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종언이 되지 않았다. 우리는 김일성의 소위 「주체사상」이라는 유물론적 「일신론」으로 무장하고 있는 이북과 사상적인 대결을 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 대결은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철학이 현실을 망각하고 우리의 현실이 철학을 망각하고 있는 오늘의 정신풍토가 지양되지 않는한, 사상 면에서의 남북 대결은 두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와 「무 이데올로기」와의 대결이 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한국의 철학이 현실을 찾고 한국의 현실이 철학을 찾기를 절실하게 요청하는 소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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