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지성 「시몬·베이유의 생애」|친구「시몬·페트리망」이 전기 출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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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고통의 순교자」로 불려지는「프랑스」의 지성「시몬·베이유」의 전기가 새로 출판됐다(불 「파야르」사간·전2부 9백80「페이지」·1백3「프랑」). 『「시몬·베이유」의 생애』라는 제목으로 그의 사후30년만에 나온 이 책은 생전에 「베이유」의 고등사범학교 동창이며 절친한 벗이었던 「시몬·페트르망」이 쓴 것으로 어떠한 비평도 감상도 거부한 사실중심의 전기다.
1943년 8월23일 34세의 젊은 나이에 결핵과 영양실조로 영국에서 세상을 떠난 「시몬·베이유」의 이 전기를 보면 지나간 30년의 공백을 전혀 느낄 수 없다. 그만큼 그는 시대를 앞선 신념을 가졌었고 또 그것을 실생활로 옮겼다는, 오늘의 모든 지성인들에게 뼈아픈 암시를 주는 선구자였다.
「프랑스」의 수재「코스」인 명문 「앙리」4세교와 고등사범학교 출신으로 철학교수자격을 갖고 있던「베이유」는 그러나 철저하게 하층 노동자로서의 생활을 직접 체험하면서 투쟁해왔다.
공장직공과 광부들, 실직자들 편에 서서 그는 연약한 몸으로 그들과 똑같은 생활을 했던 것이다. 공장직공으로 들어갔을 땐 오히려 가장 힘든 작업장을 택했었다. 농장노동자로 일하려고 하기도 했다.
철저한 반제국주의자로서 그는 열정적으로 모든 투쟁에 뛰어들었던 노조운동가였으며 평화주의자였다. 「스페인」전쟁에 자원병으로 들어간 사실은 좋은 본보기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공산당으로부터는 환영받지 못했다. 초창기 그는 반「스탈린」주의자였으며 또한 「모스크바」대숙청비난을 거부했던 「앙드레·말로」와도 의견을 달리했다. 「트로츠키」와의 논쟁은 유명하다.
그러나 한편 그의 지성인으로서의 명철한 판단은 그로 하여금 철저한 비관론에 빠지게 했다. 「시몬·페트르망」의 이 전기는 친구로서의 어떤 감상이나 평가를 완전히 없앴기 때문에 더욱 「베이유」의 참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 조그만 여자는 전혀 먹지도 않고 잠도 안자고 버티고 서있었다. 끊임없이 두통을 앓았으며 줄담배를 피웠다.』한 동료노조운동가의 말을 이렇게 인용했다.
혹시 정신분석학자들은 이러한 「베이유」의 태도, 여성다움을 거부하고 이상한 옷차림, 냉정한 행동에 대해 왈가왈부하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떠한 중요성도 갖지 못한다.
육체적 고통을 초월하여 진정한 진리를 찾아 뛰어들었던 그는 자신의 여성적인 모든 것을 제물로 희생하면서 엄격한 생활을 실천했다는 것만이 그의 죽음을 설명할 수 있는 길인 것이다.
34세에 굶는 것 때문에 죽음을 맞이한 그를 가리켜 어떤 사람은 그것을 자살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결코 그는 육체나 생활, 사물을 탐내지 않았기 때문에 「십자가는 알아도 부활을 모르는」그런 여성이었다.
『내가 가장 참을 수 없는 일은 타협한다는 것이다.』「시몬·베이유」의 이 말은 바로 그의 짧은 생애를 묶어놓는 표현이다. 그는 한번도 타협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불 「렉스프레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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