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늦잠에서 깨어난 휴일아침.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 본 희야와 나는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아. 날씨가 참 좋구나, 희야….』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언니, 우리 놀러 갈까?』 하고 내 귓가에 속삭이는 희. 파란 하늘, 찬란한 태양은 우리를 유혹했다.
오늘은 어머니를 모시고 시집간 언니네 집에 가기로 한 날인데 뭐라고 핑계를 대야 좋담.『어머니 저 희야랑 시내에 꼭 가야할 일이 좀 있어요. 언니네는 다음에 가시도록 하세요』하고 희와 나는 대문을 나섰다.
둘이는 꼭 등산을 가고싶었지만 시내에 볼일이란 핑계를 댔으니 등산복차림을 할 수가 있나. 『고궁에 들러 미술작품감상을 한 다음 동산대신 교외로 나가 산책이나 하자. 코스모스 꽃길로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참 좋을거야. 과수원에도 가고 말야.』
휴일의 고궁은 꽤 붐볐다. 연인들의 다정한 모습, 친구들끼리의 즐거운 표정들, 가족동반의 화목한 정경. 제일 나의 시선이 끌린 곳은 훌륭한 작품보다도 작품 앞에선 어느 모자의 정다운 모습이었다.
어머니의 뒤에서 비뚤어진 비녀를 바로잡아 드리기도 하고 저고리에 묻은 먼지를 털어 드리기도 하고 작품을 설명해 드리기도 하는 아들의 자상함. 우왁스러워 보이는 군복과 무뚝뚝해 보이는 표정보다는 얼마나 섬세하고 자상한가.
미남인 그 장교님도 오늘처럼 맑은 가을날엔 예쁜 아가씨를 동반하고 「데이트」도 하고 싶었겠지만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나온 효성이 내 얼굴을 뜨겁게 했다.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행복한 웃음을 지으시는 그 할머니의 표정은 어머니께 거짓말을 하고 나온 오늘을 무척 후회하게 만들었다.
『희야, 우리도 어머니 모시고 나올걸 그랬지. 우리야 앞으로 얼마든지 구경할 기회가 많지만 어머니야 우리가 모시고 다니지 않으면 밖에도 한번 못나와 보시잖아. 저 장교 좀 봐, 남자인데도 얼마나 자상하고 효성스럽니?』휴일이 많은 달, 행사의 달, 10월엔 꼭 어머니를 모시고 다니며 좋은 구경을 시켜드리자고 둘이는 약속을 했다. <연선아(서울 영등포구 오류동 179의 22 17통7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