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이 본 한국예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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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외국인이 우리를 보는 눈은 어떤 때 우리가 스스로를 생각하는 것보다 정확할 때가 있다.
일본작가 「가와바다·야스나리」(천단강성)의 작품을 영역 소개함으로써 「노벨」문학상을 타게 한 장본인 「에드워드·사이든 스티커」교수(미국「미시건」대·일본문학)의 발언의 경우가 그런 것 같다.
『저속한 미국 것들이 많이 한국으로 흘러들었고 한국에서는 이것을 열렬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사소한 예 하나만 들어도 충분할 것이다.
껌을 씹는 것이나 다른 사람들 면전에서 껌을 딱딱 소리내며 씹는 것은 미국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유쾌한 것이 못된다. 그런데 아마 유치원이나 국민학교를 제외하곤 미국의 어느 지방에서보다도 한국에서 껌을 씹는 것이나 딱딱 소리내 씹는 것이 더 심하다는 것을 나는 단언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사이든 스티커」교수는 최근 「브리태니커」한국회사에서 발간하는 월간 『배움 나무』9월호의 『외국인이 본 한국예술』특집 가운데서 『나는 이렇게 보았다-한국대중문화의 위기』라는 글을 발표, 한국예술을 비판하면서 이 같은 말도 쓰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사소한 문제에 대한 비판은 좀더 포괄적인 현대한국예술의 「모방성」에 대한 비판의 일환이다.
「모방」은 문화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이지만 『모방하는 사람이 모방의 기술을 충분히 습득하여 자기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한다는 것과 모방할 대상을 택할 때에 아주 신중히 하여 더 훌륭한 것을 택해야한다는 원칙에 비추어』 오늘날 한국예술들은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의 「저널리즘」, 새로운 유형의 건축·영화 등 그가 지적하는 결함은 우리의 반성을 촉구하기에 충분하다.
『한국「저널리즘」의 내용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형식에 관한 한 한국의 「저널리즘」이 계속해서 노예처럼 일본의 「저널리즘」을 모방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건축의 분야에서 바다물결 같은 옛날 집들의 지붕을 바라보길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건축이 실제 생활에 응용될 때는 아름답지만 자의식 적인 복고운동의 결과로서 존재하는 경우엔 그렇지가 못하다. 가령 국립박물관은 「쇼」나 겉치레만을 위해 옛 건물을 본뜬 인상이다. 또 서구의 건축양식이 아직 전통의 흐름 속에 소화돼 흐를 수 있을 만큼 그렇게 흡수되지 못한 것도 눈에 보인다. 영화와 대중음악은 일본 것을 모방한 것이 통탄스럽게도 활개치고있다.
이 두 가지를 함께 묶은 한국의 TV는 가끔 한국말이 취입된 일본의 상업TV와 거의 같이 보일 때가 있다.』
이 같은 그의 비판은 현대의 표현 밑에 전통의 깊이를 느낄 수 있게 하는 한국예술의 출현이 과제임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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