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저 멀미 … 장중 1000원 선 깨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4면

엔저 현상이 심화되면서 원-엔 환율이 장중 한때 1000원 아래로 떨어졌다. 30일 서울 외환시장 개장 직후 원-엔 환율은 100엔당 999.62원까지 하락했다. 원-엔 환율이 세 자릿수가 된 건 2008년 9월 이후 5년3개월 만이다.

 원-엔 환율은 이후 약간 반등해 1001.9원에 거래를 마쳤다. 달러 대비 원화가치가 1055.4원으로 전 거래일보다 1.5원 올랐음에도 원-엔 환율이 떨어진 건 그만큼 엔화 약세가 거셌기 때문이다. 지난 27일(현지시간) 뉴욕 외환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은 105.15엔을 기록, 5년여 만에 처음으로 105엔 선을 돌파했다. 전문가들은 “엔화 가치 하락이 예상보다 가파르다”고 입을 모은다. 시장에선 원-엔 환율이 1000원 선을 뚫는 시점을 내년으로 봐왔다.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로 달러가 강세를 보이는 상황에서 일본 정부가 양적완화 정책 기조를 유지하는 만큼 엔화 약세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가 가기 전 1000원 선이 흔들리자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우려가 나온다.

 당장 일본 기업과 직접 경쟁 관계에 있는 업종은 타격이 불가피하다. 엔화 약세로 일본 제품 가격이 내려가는 탓이다. 업계에선 철강 부문이 가장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엔저를 등에 업은 일본 철강사들이 공격적 영업에 나서면 해외 시장뿐 아니라 안방 시장까지 빼앗길 수 있다. 국내 자동차업체와 조선·기계업체가 일본 제품으로 돌아설 경우 국내 철강업체는 가격 인하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글로벌 시장에서 일본 기업과 경쟁하는 자동차와 조선업종 역시 엔저에 따른 수익 감소가 예상된다. 상대적으로 스마트폰 같은 부문에서 일본 기업을 압도하고 있는 전자·IT업종은 상대적으로 작은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엔화 약세가 하루 이틀에 끝날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배민근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주요 선진국 중 가장 마지막까지 양적완화 정책을 유지할 것으로 예상되는 국가가 일본”이라며 “향후 2~3년 이상은 엔저를 감내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이 전망하는 내년 원-엔 환율은 900원대 중반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전에도 원-엔 환율은 800~900원대에서 움직였다. 배 연구원은 “당시엔 세계 경제가 활황기여서 기업이 환율 하락을 감내할 수 있는 여지가 지금보다 컸다”며 “원-엔 환율이 세 자릿수대에 다시 진입할 경우 기업이 느낄 어려움은 당시보다 클 것”이라고 분석했다.

 전통적으로 원-엔 환율 하락은 국내 자금 시장에서 외국인 자금 이탈을 불러오는 요소였다. 하지만 이 영향은 다소 진정될 것으로 보인다. 손은정 우리선물 연구원은 “원-엔 환율이 하락해도 내년 경상수지 흑자가 40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며 “다른 신흥국과의 차별화가 두드러지면 외국인 자금 이탈은 상대적으로 덜할 전망”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만 원-엔 환율 하락이 외국인 자금의 추가 유입을 막는 요소는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내년엔 원-달러 환율도 안심하기 어렵다는 전망도 나온다.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가 본격화되면 한국의 재정건전성과 경상수지 흑자 같은 양호한 경제 펀더멘털이 부각돼 원화 가치가 가파르게 상승할 수 있기 때문이다. LG경제연구원 측은 “원화 가치의 가파른 절상으로 원-달러 환율이 1000원 선 아래로 내려갈 경우 수출 경쟁력 악화와 함께 실물경제 활력이 저하돼 경상수지 흑자인 상황에서 불황이 이어지는 ‘일본식 불황’을 겪게 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정선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