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의 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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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흰구름 조초 떠가난 안디하
새파란 나리여해
예랑 애 즈시 이슈라
일로 나릿 재벽해
랑 애 다니다샤은
마사매 갓할 좇누아져
아으 잣가지 노파
서리 몯누울 화판(화랑장)이여.
신라때의 향가 「찬기파랑가」다.
작자는 충담이라는 승려, 노래의 내용은 기파랑이라는 화랑도를 찬미한 것이다. 그리고 보면 지금 남아있는 향가의 거의 전부가 부처님이 아니면 화랑을 노래한 것이다.
모죽지랑가는 화랑 죽지를 사모하는 마음을 담았다. 천관원사가 또 있다. 진평왕 때의 기생이 김유신 장군을 원망하는 노래다.
화랑이란 신라의 꽃이나 다름없었다. 귀족의 자제들 중에서도 용모가 아름답고 품위가 있는 청소년들만이 뽑혔었다. 그리고 멋을 알았다. 화랑을 두고 때로는 풍월도니 풍류도니 부른 것도 까닭이 있었다. 그들은 작은 금관을 쓰고 금은주옥으로 장식한 무복을 입고 금 동으로 수놓은 신발을 신었다.
요대에는 검을 차고 패물도 달았다. 귀에는 또 귀고리, 목에는 목걸이, 팔목에 팔지,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얼굴도 곱게 분단장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말을 타고 수천의 낭도를 거느리고 무술을 연마하는 한편, 아름다운 자연을 찾아 다녔다.
이들이 즐겨 찾던 곳이 남산, 바로 어제 개관된 「화랑의 집」이 들어앉은 산이다.
옛 신라사람들은 이곳을 영장으로 여기며 신성시했다. 그만큼 사계절의 자연이 아름답기도 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깊은 계곡의 사이사이에 신라사람들은 석탑이며 석상을 수 없이 세웠다. 범패종고소리가 오어수성과 엇갈리며 기묘한 합창시를 엮어주던 곳이었다.
왜 이런 곳을 화랑도들이 즐겨 찾았는지? 역사책에서도 그저 그들의 미의식이 피어났으며 또 그것을 더욱 다듬기 위해서였다고 풀이하고 있다. 어딘가 미흡한 풀이인 것만 같다. 미와 무가 어떻게 어울려지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화랑도의 지도이념인 세속오계는 원광법사가 꾸며냈다고 한다. 이것을 가지고 통일을 앞둔 새시대의 「엘리트」상을 키워 내려했다고도 한다. 그럴 법한 얘기다. 유나 불만으로는 나라의 비약을 위한 새 일꾼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상무의 기상을 강조하는 한편으로 「상열이가악」이며 「유오산천」등도 아울러 장려했었는지, 충분한 풀이가 아직 없다. 남자들이 화랑도가 되기 이전에 왜 하필이면 아름다운 소녀들을 원화로 만들었었는지도 분명치가 않다. 이른바 화랑도에 대해서는 우리는 너무나도 모르는 게 많은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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