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시도」안보인 타성의 무대|제1회「젊은 연극제」를 보고|한상철(연극 평론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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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에저토」연극 장이 서울 을지로 입구에서 종로2가로 옮기면서 한국 초유의 「젊은 연극제」를 5월18일∼6월 9얼까지 20일간 열어 10개 극단의 10개 작품이 공연되었다.
기성 연극이 굳건한 지반을 확립했을 때 「아마추어」연극은 이에 대한「안티테제」로서 그 당위성을 갖는다.
그러나 한국에서처럼 기성과 「아마추어」의 구별이 별반 없는 극계에서 「아마추어」연극의 당위성을 찾는데는 많은 모순과 당혹 감을 동반한다. 이번 「젊은 연극제」는 그러한 모순과 당혹 감의 현장을 목격케 하고 그 심도를 재어 보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우선 현장을 보자. 죽은 애인을 잊지 못하다 남편의 손에 죽음(죽음)을 받는 『몽상 여』(설인)나 난잡한 촌 생활로 불구가 된 남편을 가진 여자의 『어느 위치』(현대)는 젊은 작가의 의식의 세계와 지성의 깊이에 심한 불안을 던져준 대표적인 제례라 할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인 것이 현대의 공해문제를 다룬 『탄기』(에저토)였는데 현재와 과거, 강과 유를 교차 대립시킨 「드라머」의 기본 구성을 갖춘 작품이었다. 그러나 연기자의 고통스런 연기가 관극 자체의 고통 때문에 저항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은 연기의 미숙 이전에 연극에 있어서 내용과 표현 형식(특히 배우의 표현적)간의 상관관계에서 오는 문제였다.
이번 연극제에서 눈에 띄는 현상의 하나는 언어보다 배우의 동작·몸짓에 많은 역점을 두고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현상은 환영할만한 일이나 그 표현법이 표현하려는 내용이나 배우의 내적 충동과 아무 필연성도 없이 다만 표현 술 자체의 신기 성이나 이 색감의 효과만 노렸다면 그것은 서투른 원숭이의 재주를 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연기의 미학적·생리적·심리적 가치에 대한 연구 없이는 특히 한국연극은 새로워 질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그에 대한 하나의 처방으로 보여진 것이 『벙어리 아내를 가진 판사』(작업)와 『금수회의록』(민예)이었다. 『벙어리…』는 소극 풍의 번역극인데 이룰 동작의 분절 및 굴절화의 실험대상으로 삼았고 『금수…』는 가면을 쓰지 않은 인간의 동물화를 실험해볼 수 있는 작풍이었다. 훈련의 치밀성과 심화의 부족으로 성과는 크지 못했으나 앞으로 배우훈련의 한 방법을 제시해주고는 있다.
그밖에 번역극으로 『등아』(동인)나 『천사의 가면』(극예)은 그저 평범한 대학생 극에 그쳤고 공연횟수가 가장 많은 극단 중 「가교」의 이색적인 그림자극(평화의 왕자)에 비해 「실험」의 『놀부뎐』은 우수한 희곡에도 불구하고 그 불성실로 해서 관객들을 실망시켰다.
이번 행사 중 비교적 소극장공연에 가장 잘 어울리는 공연은 『춤추는 인형들』(방주)이었다. 작가나 연기자가 무엇인가 그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에 부딪쳐보려는 몸부림을 엿보여준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작자자신의 말(덜 여문시)이 너무 많고 속도감이 없는 연출로 강한 「이미지」전달이 미흡한 일종의 시 낭송회의 변화 같은 결함이 있었지만 말이다. 그만큼 이번 행사가 쓸쓸했다고도 볼 수 있겠다.
나는 한국의 청년연극이 무엇을 어떻게 해가야 된다는 점괘를 내놓을 재간은 없다. 그러나 이번 연극제를 통해 어떠한 것이 청년연극이 아닌가 하는 점만은 뚜렷해 졌고 그것이 이번 연극제의 의의의 하나라면 하나다.
그러나 설령 그 몇 가지 점이 시정되어 내년에는 보다 나은 연극제가 마련된다 하더라도 본질적인 문제는 남아있다. 그것은 별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훌륭한 천문학자가 될 수 없듯이 연극을 사랑하지 않고는 훌륭한 연극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랑은 대가없는 헌신이다. 그것은 어떤 기술이나 방법으로는 도달 될 수 없는 그 너머의 경지이다.
만약 연극에 쏟는 정열이 헌신이 아니며 연극을 통해 자기를 빛내고 자기를 사랑하려 할 때 그 연극은 허위이고 거래이며 매춘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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