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의 좌표|숭전대 철학회 제7회 사상강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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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숭전대 철학회는 18, 19일 서울YMCA강당에서 「지성의 좌표」를 주제로 한 제7회 사상강좌를 가졌다.
이 강좌에서 조요한 교수는 『「소크라테스」의 비판의 철학』을, 최명관 교수는 『「데카르트」의 방법의 철학』을, 고범서 교수는 『「니버」의 정의의 철학』을, 안병욱 교수는 『한용운의 저항의 인간』을 각각 발표, 오늘의 싯점에서 부각돼야 할 동서양 사상가들의 정신을 설명했다.
한국 철학계에 있어서의 자기 현실에 대한 철저한 인식은 벌써부터 요구돼온 것이지만 뚜렷한 방향과 좌절없는 용기와 같은 행동력이 결여돼 왔다.
따라서 흔히 동서고금의 철학자들의 사상을 자주 강단이나 저서를 통해 논하면서도 그 사상과 정신은 우리와 너무 거리가 먼 공허한 이론처럼 들리곤 한다.
때문에 현실을 잘 인식한 위대한 사상가들의 철학정신을 오늘의 우리 현실 가운데서 생생히 의식하기는 아직도 어려운 것이 되고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날 숭전대 사상 강좌에서 논의된 「소크라테스」나 「데카르트」 또 「라인홀드·니버」나 한용운의 의미는 한국 철학계가 어떻게 현실이해에 접근할 수 있는가 하는 방향모색의 한 작업으로서 평가될만하다.
가령 서양철학의 아버지격인 「소크라테스」의 사상이 이야기되는 것은 아주 초보적이고 진부한 넋두리로 볼 수 있지만 실상 「소크라테스」의 이해야말로 철학정신의 기본을 습득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어디에 가서든지 무릎을 맞대고 온종일 설득시키는 일』을 자기의 사명으로 생각한 점을 조 교수는 높이 샀다.
「소피스트」들이 상대방의 의견을 부정하고 파괴하여 약한 논거를 강하게 하는 토론술을 발전시켰지만 「소크라테스」는 서로 친구로서 문답을 교환하는 대화의 방법으로써 지성의 능력을 도와 실재에 이끌어 가는 방법을 택했다.
『민주주의는 일방적인 말로 이미 마련된 생각을 상대방에게 덮어씌우는 일에서 이루어질 수 없고 대화의 형식으로 상대방의 이론을 조목조목 음미하여 그 속에 포함된 모순당착을 자각시켜서 바른 길에 따라 진리에 도달케 하는 일에서 이뤄질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조교수는 『2천4백년 전에 「아테네」에 있었던 토론방식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가 많다』고 설명, 『좀더 활발한 토론이 전개되는 것이 민주주의 창달과 생활의 과학화를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소크라테스」가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공리에서 출발하는 정신을 고취한 점에 주의해야 한다.
『국가에 있어서 지식인의 역할은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것의 제시에 있고 그릇된 논리에 대한 건설적인 논박에 있다』고 조교수는 설명한다.
또 「소크라테스」는 단순한 논리의 규명만 관심을 두지 않고 종래의 도덕개념을 재평가함으로써 「아테네」의 도덕언어를 재확립하려 했다.
「힘이 정의」라는 식의 실용적 공리적 도덕개념에 대해 그는 그것들은 인간행동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과 관련시켜 생각해야 한다고 봤다. 덕과 선 그리고 행복은 부나 지위나 평판과 같은 외적 조건이 아니고 「정신을 돌보는 일」이라고 한 것은 곧 「참과 거짓, 선과 악을 헤아려내는 합리적 사유」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소크라테스」의 비판정신은 「힘이 정의」라는 사회기풍이 풍미하는 사회에서 더욱 부각돼야겠다는 것이다.
그러한 「소크라테스」의 정신은 「데카르트」에게도 연결된다.
「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확신을 가지고 걸어가기 위하여, 참된 것을 거짓된 것으로부터 가려낼 줄 알았으면 하는 극도의 열의를 가지고 살았던 그는 진리탐구의 방법으로서 확실성과 명증성을 제1로 내세울 수 있었다고 최명관 교수는 설명했다.
「확신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정신」은 「니버」에게도 한용운에게도 살아있다.
「니버」는 그리스도의 사업을 구원론적 영역에만 제한될 것이 아니라 생의 현실에 있어서 우리가 어떻게 되지 않으면 안될 것인가 하는 당위의 계시로써 설명한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철두철미 구원과 도덕에 관한 「메시지」라는 것이다.
기독교 현실주의의 입장에서 「니버」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설명했으며 개인 대 개인간에는 사랑과 도덕이 비교적 높이 실현될 수 있지만 집단간의 관계에선 집단적 이기주의가 강력히 작용하기 때문에 사랑과 도덕의 실현이 어렵다고 했다.
때문에 이기적인 개인이 힘을 독점하면 자기와 자기 집안과 계급의 이익을 위해 이 힘을 남용하게 되기 때문에 이기중심은 힘의 균형에 의한 강제력에 의해서만 견제할 수 있다는 것.
사랑의 사회적 실현은 정의로운 사회제도에서만 실현되는 때문에 개인의 회개에 의존하는 낭만적인 사회관을 그는 거부했다고 고 교수는 말한다.
개인이 거듭나면 정의로운 사회가 저절로 온다는 허망한 생각에 대해 「니버」의 신학은 이것은 위선이며 망상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용운은 정의의 실현을 위해 행동하고 실천한 인물로서 높이 평가되는 것이다.
안병욱 교수는 만해 한용운이 일제의 총칼과 돈의 유혹 앞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했던 점을 강조했다.
「많은 인물들이 항일 전선에 나섰다가 일제의 총칼과 감옥의 위협 앞에, 돈과 명예와 지위의 유혹 앞에, 혹은 시대의 대세 앞에 굴복하고 변절하고 아부했던데 비해 만해는 불퇴전의 용기와 불출의 기백을 가지고 일제에 끝까지 저항 대결했다」는 것.
민족독립에 대한 확신 때문에 그는 창대와 같은 지조와 상록수와 같은 용기로 항일전선에 나설 수 있다는 안 교수의 설명이다. <공종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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