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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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난 연말에 내가 열 다섯 개의 봉투를 만들 때 아빠는 그게 뭐냐고 의아해했다.
내가 봉투를 다 만들고 난 뒤 겉봉에 부식비, 기호품, 피복비 등… 가계부의 항목별을 적을때 아빠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Em덕이면서도 크게 웃었다.
가계부를 그냥 적으면 됐지 그렇게 봉투까지 만들게 뭐냐고….
그러나 지난해 가계부를 쓰다가 중단한 나로서는 그렇게 우스운 일일수가 없는 것이 오히려 봉투마다 예산 잡은 돈을 얇게 나누어 넣고 나니 한 달이 까마득히 내다보이는 게 심각하기만 했다.
가계부 쓰기를 실패한 대부분의 주부들이 그러하듯 나 역시 적자와 외상거래가 그 원인이었다.
그리고 알뜰하게만 한다고 부식비에서 인색을 떨며 10원어치의 콩나물 사기도 주저하며 김치 한가지로만 덩그러니 밥상도 차렸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약방은 큰집 드나들듯 했었으니 들이켜 반성해보면 그것은 합리적인 가계운영이 아니었다.
우환이 곧 도둑이라 했거늘 영양에 균형이 잡힌 식탁은 곧 가족을 건강하게 하고 건강한 가족에겐 행복이 있는 것이라고 깨닫게되니 식생활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잡곡밥과 국수를 즐겨하여 밭의 고기라 일컫는 콩 음식을 한끼도 빠지지 않도록 노력을 하게되었다.
그래서 저녁이면 우리 집에선 맛있는 담북장 냄새가 식욕을 돋운다.
반면 피복비와 교제비, 주거비는 되도록 줄여나가고 가계부 쓰기도 곤란한 외상거래는 일체 안 하기로 했다.
우선 올해는 1쌈지봉투로 흑자 가계를 꾸리고 내년부터는 아빠 말처럼 그냥 지갑에 돈을 넣어 살림을 해도 될 정도의 훈련을 해야겠다.
이번 달에 내 겨울바지를 꼭 하나 마취 입으려고 했지만 가계부를 적는 동안 주마다 착착 흑자의 숫자가 나오는걸 보니 그까짓 통 좁은 구식바지쯤 아무렇지도 않다. 마침 맞춤옷이라 뒤집어 아랫부분을 따 좀 넓게 만드니 요즘 유행하는 바지처럼 봉이 넓고 보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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