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름 숨겼다, 신랄하고 야해지려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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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작가의 이름도 얼굴도 알 수 없다. 독자가 알 수 있는 것은 작가 이름의 영어 머리글자 한 글자뿐. 선심 쓰듯 공개한 신체 일부분-손이나 발 등-의 사진이 작가와 관련한 유일한 정보다.

 이 다소 낯설고도 흥미로운 실험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운영하는 문장 웹진(webzine.munjang.or.kr)에서 진행하는 익명소설 연재 프로젝트다. 지난 8월부터 시작된 이 프로젝트에는 총 10명의 작가가 참여해 매달 한 명씩 소설 한 편을 싣는다. ‘물고기자리’ ‘달밤에 고백’ ‘거기에 그렇게 그들은’ 등 5편이 이미 공개됐다.

 소설가에게 이름은 하나의 브랜드다. 반면 거추장스럽거나 부담스러운 꼬리표가 되기도 한다. 작가들이 가명 혹은 익명의 탈출구를 찾는 이유다. 『유럽의 교육』과 공쿠르상 수상작 『하늘의 뿌리』 등을 쓴 작가 로맹 가리(1914~80)가 대표적이다. 최근 한 드라마에 등장해 베스트셀러 순위에 이름을 올린 『자기 앞의 생』은 로맹 가리가 1975년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쓴 책이다. 전작의 부진 등에 시달리던 ‘해리 포터’ 시리즈의 작가 조앤 롤링도 탐정소설인 『쿠쿠스 콜링』을 출간하면서 ‘로버트 갤브레이스’라는 다른 이름을 사용했다.

 익명소설 연재에 참여한 작가들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유든 본인 이름을 걸고 발표하지 못할 글을 모았다’는 이들도 파격적인 실험을 꿈꾼다. “끝 간 데 없이 신랄해지고 싶었다. 고발하고 도발하고 폭발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야해지고 싶었다. 다양한 의미로 점잖지 못한 글들 말이다”는 도발적인 출사표는 기존 스타일에 대한 기대나 각종 제약에서 벗어나 가지 않은 길을 가보겠다는 선언으로 들린다.

 장르소설에 대한 편견이나 사실주의에 대한 강박, 정치적 풍자에 대한 거부감, 에로티시즘에 대한 폄하 등 각종 금기 코드에 반기를 드는 것도 익명소설이 시도하는 새로운 실험의 영역에 포함된다.

 예로 강간을 당해 살해당한 여자와 그 범행 장면을 지켜본 사실상 공범인 남자가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뒤 영혼결혼식을 통해 부부가 되는 이야기를 담은 단편 ‘뼈바늘’이나 한국의 대학병원에서 실습을 하는 중동 출신의 의대생을 화자로 한 단편 ‘해피쿠키이어’ 등은 그간의 소설에서 쉽게 경험할 수 없었던 이야기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정대훈 차장은 “연재하는 작가들도 누가 글을 쓰는지 모른다. 작가는 연재 작품을 묶은 단행본이 출간된 1년 뒤에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단행본은 총 10편의 연재가 끝나는 내년 5~6월쯤 출간될 예정이다.

하현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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