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배상' 달라진 법원 … 화해위 결정 다시 조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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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때 숨진 곽모씨의 유족들은 “아버지가 사망한 건 경찰의 폭행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곽씨 사건은 2010년 5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에서 진실규명(피해인정) 결정을 받았다. 이에 유족들은 재작년 12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1심은 진실화해위 결정을 토대로 4800만원 배상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항소심 판단은 달랐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항소2부(부장 김익현)는 지난달 26일 유족들의 청구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진실화해위의 조사기록을 검토한 결과 폭행 주체가 경찰인지, 마을 주민인지 확실치 않다”고 밝혔다.

 최근 과거사 피해와 관련된 재판에 나타난 변화의 일부다. ‘예산으로 갚는 과거사 연 1340억’ 제하의 본지 기사(4월 29일자 1, 4, 5면)가 영향을 미쳤다. 그 이전에 법원은 진실화해위 결정이 있으면 사실관계 조사를 거의 하지 않았다. 재판부마다 들쭉날쭉하던 배상기준도 세워졌고 소송 제기 대상이 어디까지인지도 규정됐다.

 물꼬는 대법원이 텄다. 대법원은 기사가 나간 직후인 지난 5월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과거사 재판의 4대 기준을 제시했다. ▶진실화해위 결정 후 3년이 지나지 않은 사건만 소송을 낼 수 있고 ▶위원회 결정과 관계없이 법정에서 사실관계를 다시 따져야 하며 ▶배상액은 기존 판례와 비슷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송 낼 시한을 넘겼다는 정부 주장은 권리남용이라는 결론도 덧붙였다. 이후 하급심 재판부들은 판결문에 ‘사실관계에 대한 위원회 조사기록을 검토했다’는 문구를 명시하고 있다. 곽씨 사건처럼 사실관계가 불확실해 기각되는 사례가 나오는 배경이다.

 서울중앙지법은 최근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희생자 관련 사건 중 20여 건을 무더기로 기각했다. 소송 제기 시한을 넘겼다는 이유였다. 배상액도 당사자가 가장 많은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기준으로 피해자 본인 8000만원, 배우자 4000만원, 직계 가족 2000만원으로 평준화됐다.

 이러다 보니 피해자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 전 사무총장 김현숙씨는 “최근 법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소송이 기각되는 사례가 늘었다”며 “같이 피해를 본 한 마을 사람들 가운데 누구는 배상받고 누구는 한 푼도 받지 못하는 것이 법적으로는 맞을지 모르겠지만 형평성에는 어긋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아직 검찰도 불만이다. 법정에서 사실관계를 따진다고는 하지만 진실화해위의 결정을 받은 사건은 유족 측 승소가 많아서다. 본지가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이후 전국 법원에서 선고된 과거사 배상 사건 389건을 분석한 결과 298건(76%)에서 유족이 승소(일부 승소 포함)했다. 전체 민사사건의 원고 승소율(55% 수준)보다 20%포인트 이상 높다. 국가배상 소송을 담당하는 서울고검 백찬하 검사는 최근 발표한 논문에서 “위원회 활동 종료 직전인 2010년 6월에만 1046건 등 조사와 심의가 부족한 상태에서 처리된 사건이 많다”며 “결과를 신뢰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박민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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