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백제인 박사 왕인의 위업|김창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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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중앙일보는 오늘부터 4면에 「박사 왕인의 위업」을 약 15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백제의 문화사절로 고대 일본에 파견됐던 박사 왕인은 일본문화의 대은인으로 숭앙될 만큼 한국문화의 일본전파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그러나 왕인에 대한 사료는 국내에는 거의 없는 실정이고 오직 일본기록에만 나타나며, 그 유적과 후예들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이 기획물의 필자 김창수씨(사진) (제3대 민의원 의원·농업문제 전문가) 는 지난 5년간 왕인 유적에 관심을 갖고 도일 답사와 문헌연구로 그의 전모를 밝혀내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숨은 연구가입니다. 이 연재는 일본 「아스까」벽화고분발굴 이래 활발히 논의되고있는 고대 한·일 문화교류사의 한 측면을 독자들에게 제시해줄 것입니다. <편집자 주>
나는 오랫동안 농촌문제에 관심을 가졌었기 때문에 일본의 농촌을 조사연구차 도일해 각지를 순방하던 중 대판에서 백제 왕인 묘를 참배하게 된 것이 이 글을 쓰게 된 동기가 됐다.
왕인은 백제 때의 학자임에도 그에 대하여 우리 나라에서는 별로 말하는 사학가도 없으려니와 문헌도 없고 다만 근자에 단편적인 소개를 볼뿐이다.
그러나 지난 수년동안 왕인에 대해 개인적으로 조사한 결과 일본에 쌓아 놓은 그의 위업은 대단한 것이었고 일본인의 그에 대해 흠모하는 마음이란 놀라운 것이었다. 일본 국민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를 「문학의 시조」「국민의 대은인」으로 받들어 숭앙하고있다.
필자는 사학가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조상을 저들은 1천 수백년간 극진히 모셔오는데 우리가 무관심할 수 있을까. 적어도 민족적 양심에서 조상의 역사를 우리 손으로 되새겨 놓아야겠다는 사명감에서 그동안 왕인 유적에 관한 자료를 수집, 여기에 정리해본 것이다.
대판에서 구대환씨의 안내를 받아 왕인 묘를 참배하게 된 것은 70년 여름.
4백여만의 인구가 붐비는 대판을 벗어나 북으로 1시간쯤 차를 몰아가니 이윽고 비산비야의 아름답고 온화한 대자등촌에 이르렀다.
이곳은 일본의 고대국가 형성의 요람지로서 군사·외교적으로 가장 중요했던「하내국 영역」이요 응신천황과 대웅학천황 시의 옛 도읍지이다. 왕인의 묘는 바로 이 마을 동북의 어능곡이라 일컫는 곳에 위치한다.
입구에서 차를 내려 경내에 들어서니 솔밭 사이로 대여섯 채의 인가가 눈에 띄었다. 뒤에 안 일이지만 그 집들은 우리 나라 사람이 사는 동네였다. 해방 전부터 이곳에 와서 정착해 이제 70이 불원이라는 한 노인을 만나 묘의 소재지를 물어봤다.
산길을 타고 조금 내려오니 약 2천평 되는 야산에 수림이 들어서 있고 사냥꾼도 출입을 금하여 무척 적막한 곳이었다. 그 북쪽 끝에 높이 8∼9척 돼 보이는 묘석에 「박사 왕인 분」이라고 행서로 조각한 것이 눈에 띄었다. 대석은 3층인데 1층엔 네 귀가 불쑥 내민 돌에 귀갑의 무늬가 새겨있다.
이곳은 이르기를 「왕인 공원」이라고 했다. 그의 후예와 일반 유지들이 문정 10년(820년 전후)에 건립한 것으로서 궁치인친왕 친필의 비명이라고 했다.
왕인의 묘비는 이밖에도 하나 더 있었다. 여기서 40∼50보 떨어져 있는 곳에 이르니 울창한 송림 속에 반반한 분지가 있는데 40∼50평되는 터에 주위를 돌담으로 쌓았고 그 안에 향익과 수선발을 갖추어 놓았으며 묘석 둘이 서있다. 그중 장방형의 묘석에는 「박사 왕인 묘」라 해서로 새겼는데 이것은 1720년께에 당시 영주였던 구패우위문이 이 명승이 끝내 인멸될 것을 염려하여 건립한 것으로 전한다.
다른 하나의 묘석은 4, 5척 사이 두고 토단 위에 세워진 원형의 자연석이다. 우면에 파놓은 글자가 유구한 세월동안 풍우에 씻겨 그 흔적이 악간 남아있을 뿐 알아보기가 어렵다.
고색 창연한 이 돌이야말로 1천6백여년 전부터 전래하는 유일한 묘석임이 분명하다. 이 점은 명소 구적의 전문가인 경도의 유가 병천오시낭 씨가 그같이 확인한 바다.
옷깃을 여미고 머리를 숙인 채 조용히 서있는 동안 어느새 유구한 역사를 더듬어 진실로 회고의 정을 금하기 어려웠다. 고대 일본문화의 시조요 그 국민의 대은인으로 크게 숭앙 받는 우리의 선현 왕인은 여기에 엄존하고 있다.
다시 한번 분묘를 둘러보았다. 적막한 경내에 수풀은 울창한데 지덕을 널리 펴놓고 천고의 역사를 간직한 채 숙연하게 서있는 묘석만 더욱 드높게 보였다.
도와 덕을 펴기에 이역에서 일생을 마쳤고 조국문화의 해외개발에 사명을 다하였고 이웃나라를 사랑하기에 몸을 아끼지 않았으며 무식을 정벌하기에 상하를 가리지 않았던 그 위업을 바로 여기서 볼 수 있었다.
나는 한국인 후예라는 그 촌노인과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묘」라는 말을 쓰지 않고 반드시 「왕인능」이라 했다. 고래로 사철 향화가 끊기지를 않았고 외국인들도 간혹 오거니와 일본인들은 물론 명승고적을 찾는 외국인도 더러 참배하는데 한국인은 오는 이가 매우 드물다고 하며 노인은 서글픈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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