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일임계좌 손실 나면 소개만 해준 증권사도 책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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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한국투자증권의 한 지점을 방문한 이모(66)씨는 직원으로부터 세이프에셋 투자자문의 투자일임계약을 추천받았다. 코스피200지수 옵션에 투자해 매월 평균 3.12%의 안정적 수익을 올릴 수 있게 설계됐다는 얘기에 그는 세이프에셋과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3개월 뒤 코스피200지수가 급락하자 1억6000여만원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함께 계약을 체결한 매형 백모(75)씨도 1억2000여만원을 날렸다. 세이프에셋이 손실 방지 조치를 제대로 취하지 않은 과실이 겹쳐 손실 규모가 커졌다. 이씨 등은 “손실 위험에 대한 설명 없이 상품을 소개했다”며 한투증권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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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판 과정에서 한투증권은 자신이 판매한 상품이 아니기 때문에 설명 의무가 없다고 주장했다. 상품을 단순히 소개해 준 뒤 이씨의 편의를 위해 계약 체결을 도와준 것이지 자본시장법상 설명 의무가 있는 ‘상품을 권유해서 판매한 자’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 근거로 판매수수료와 운용수익을 얻지 않았고 직접 취급하는 상품도 아니라는 점을 들었다.

 하지만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다. 서울고법 민사14부(부장 윤준)는 이씨와 백씨가 한투증권을 상대로 제기한 손배소에서 “손해액의 40%에 해당하는 1억1200여만원을 배상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고 26일 밝혔다. 1심에서 인정된 손해배상비율 20%에서 두 배 늘어난 금액이다. 재판부는 ▶직원이 해당 상품을 먼저 권유한 점 ▶직원 설명을 듣고 나서 투자 의사를 갖게 된 점 ▶판매수수료는 받지 않았어도 매매 시 발생하는 거래 수수료를 받았던 점에 비춰 볼 때 판매를 권유한 것으로 보인다는 뜻이다. 재판부는 “수수료를 받지 않고 직접 판매하는 상품이 아니지만 증권사가 적극적으로 해당 상품을 권유한 것으로 보인다”며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이 판결에 대해 전문가들은 ‘단순 소개’라는 구실로 적절한 규제를 받지 않고 투자일임계약 등을 체결해 온 증권사들의 관행에 제동을 건 것으로 평가했다. 지금까지 투자일임계약을 직접 체결한 증권사나 운용사가 수수료를 많이 받기 위해 무리한 운용을 한 경우 책임을 진 사례는 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31부는 2009년 김모씨가 하나대투증권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계약직 투자상담사의 무리한 투자로 인한 손실 책임을 물어 76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상품을 단순 소개한 증권사에 책임을 지운 경우는 거의 없었다.

 법무법인 한누리 전영준 변호사는 “정식으로 취급하지 않는 상품을 소개해 주면서 자사 계좌를 이용하게 해 수익을 얻는 식의 증권사 영업행태를 내버려두면 법적 공백으로 피해자가 발생하게 된다”며 “적극 권유한 정황이 있을 경우 설명 의무를 지켜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 최근 저축은행 및 동양 사태 등을 계기로 무분별한 금융상품 판매를 억제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도 반영됐다는 평가다. 진현민 서울고법 공보관은 “투자자들이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소비자들과 직접 대면하는 판매 직원들에게 보다 엄격한 책임을 지우는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박민제 기자

투자일임계약=투좌 계좌의 운용 권한을 증권사·자문사·자산운용사 등 투자일임업 자격이 있는 금융사에 맡겨 수익을 얻는 방식의 위탁계약이다. 자문형 랩, 랩어카운트 등이 대표적인 투자일임계약 상품이다. 지난 9월 기준 투자일임계약 규모는 약 287조원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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