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고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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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밀고사회」는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밀고가 이상사회를 이룩했던 시대는 없다. 그것은 개방사회의 정반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역사상 밀고가 성행한 시대는 중세의 암흑기이다. 그 당시는 「로마」교황이 모든 세속적 권력까지도 장악했었다. 교회의 「하이어라키」(계층조직)는 더 없이 엄격했다. 이런 사회일수록 모든 정보의 소통은 밀고에 의존했었다. 성직자의 사생활에서부터 국정의 내막에 이르기까지 수근수근 귓속말로 정보가 전달되었다.
「유럽」의 「르네상스」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자기보호본능에서 비롯되었다. 암흑의 속박에서 벗어나 개인과 개성의 해방, 그리고 그 존중을 외치게 되었다.
밀고의 상황은 결국 사회의 침체에 원인이 있다. 허심탄회하고 소탈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면 굳이 밀고를 할 필요가 없다. 모든 정보는 「여론」이라는 여과장치를 통해 하나의 정책으로 성숙된다. 이것은 민주사회의 ABC에 속하는 문제요, 또한 그 기초인 것은 새삼 번 세의 여지가 없다.
최근 미국정부의 막후 인물인 「키신저」의 사생활이 신문「가시프」에 심심찮게 오르내리는 것을 자주 본다. 그러나 그 장본인은 물론, 미국시민의 반응은 하찮을 뿐이다. 그런 은밀한 광경들이 햇볕을 받지 못했다면 그것은 당연히「수근수근」의 근거가 되고도 남는다. 그러나 미국은 개방사회이다. 그 나라의 강점은 바로 이런 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서로가 도덕적인 수준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밀고를 단순히 그 사실에 집착해서 평가하는 것은 비굴하다. 민주사회의 바탕은 신뢰에 있다. 시민은 국가를, 국가는 시민을 믿으려고 힘쓴다. 따라서 사회의 모든 조직은 신뢰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이 무너질 때는 필연적으로 체제의 개편을 요구하게 된다. 선거가 바로 그런 제도적 장치이다. 굳이 밀고와 같은 방식을 유지하는 것은 상오불신을 초래할 뿐이다. 결국 민주사회의 바탕을 흔드는 계기가 되기도 쉽다.
동양적인 금도는 더 엄숙하다. 듣지 못할 험한 말을 들으면, 그 귀를 맑은 시냇물에 씻었다는 고사도 있다. 허유와 같은 초 세속적인 선비가 아니라도, 동양의 예의는 깊고 의연한 도량을 가르쳐준다. 익명의 투서나 밀고에 연연한 정사는 실로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최근 수묘 당국은 밀고를 무시해 버리도록 하겠다는 조처를 취한바 있다. 또 국세청도 제보세무사찰을 억제할 방침이라고 한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 대가는 소탈한 정보소통이 보장되는 개방사회를 이룩하는데 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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