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사 복원공사 얼마나 진전됐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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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경주 불국사 중건사업은 21일부터 마지막 3차 년도 공사가 착수됐다. 무 설전·비로 전·관음전에 이어 금년에 세우는 건물은 대웅전과 극락전을 감싸는 96간(300m)의 길고 긴 회랑. 그래서 신라성대의 옛 규모를 되살려내려는 이 거창한 불사는 착공 38개월 만인 오는 10월말까지 일단락 지어 준공식을 가질 예정이며, 이로써 1천년 이전의 가람 배 직 상을 보이는 국내 유 일의 본보기가 된다.
【경주=이종석 기자】기존의 대웅전 뒤편에 선 무 설전은 96평의 큰 설법강당. 그 뒤쪽으로 마련된 비로 전은 지금 극락전에 모셔있는 비로 자나 불이 원래 봉안됐던 불전이고, 맨 뒤쪽의 관음전에는 새로 관음보살을 조성해 모실 아담한 전각이다. 이들 3동의 목조건물은 고려시대에서 이조 초에 걸치는 건축양식으로 각기 지어 화사하게 단청까지 끝마쳤다. 비로 전과 관음전 주위에는 돌담까지 말끔히 쳐놓았으나 출입문만은 금년 공사 분으로 남아있다.
금년으로 매듭지을 중요공사 내용은 이들 건물을 연결하는 긴 회랑의 신축이다. 이조 말까지도 회랑의 일부가 남아 있었는데 그것을 보았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대응전과 석가탑·다보탑 등이 덩그만히 드러난 종전의 모습을 알뿐이다. 그러나 이번 회랑은 대웅전 뒤의 무 설전 측면에서 시작해 다보탑 앞의 석축에서 꺾어 현존 정문인 자하문을 거치고 범 영루 에서 다시 꺾어 무 설전 서쪽 측면에 이른다.

<사찰면모 일신할 회랑>
그래서 대웅전과 석가탑·다보탑은 회랑건물에 폭 감 싸여 탑이 있는 마당조차 불전의 영역에 들어가는 셈이 된다. 또 다른 하나의 회랑은 범영루 석축 밑에서 시작하여 안양 문을 거쳐 극락전을 휘돌아 그 끝이 대웅전에 오르는 돌층계에 이르러 멎게 된다.
이렇게 되면 불국사의 인상은 지금과 딴만으로 바뀌게 마련이다. 전면 석축의 동쪽 끄트머리에 좌경 루 라는 누각이 서고 자하문 옆의 범영루는 새로 개축해 지금 것보다 좀 축소된다. 그리고 안양문의 서쪽 끄트머리에도 조그만 누각이 서면서 그들 좌·우 경 루의 사이에는 벽으로 막힌 회랑이 연결되는 것이다.
뿐더러 전면 회랑은 마당 위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2층의 석축 위에 올라서게 된다. 아래층 석축에 무늬 고운 돌기둥을 세워 목조건물을 앉히게 되므로 앞에서 보면 누각 같은 회랑이 되는 것이다. 원래의 석축이 2단으로 된 점이나 석축 사이사이에 반듯반듯한 석주를 끼운 까닭도 이에 있다. 특히 돌층계 밑의 청운 교 백운교가 왜 생겼었나 하는 비밀이 이로써 환히 밝혀지게 된다.

<인부 연 10만 명 동원>
이들 건물은 당초 철근 콘크리트로 세울 계획이었으나 우리 나라 고유의 건축이 모두 목조이고 또 콘크리트 구성의 문제점이 많아 순수한 목조와 가로 짓게 된 것이다. 여기에 소요된 목재는 무 설전 비로 전 관음전 3동에 22만8천재, 회랑 건축에 약 30만 재 예측하여 총 50만 재.
원목으로는 80만 재, 트럭으로 8백대 분이다. 이들 목재의 60%는 뉴질랜드 송이지만, 연 목과 포를 짜는 목재는 강원도 일대에서 두루 구해온 육송과 잣나무다. 역시 우리 나라 목재가 질기고 트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둥과 대들보 같이 큰 부재는 수입 목으로 충당할 수밖에 없다. 비로 전의 대들보는 직경 70cm에 길이 4m60cm 니까, 원목으로는 1m10cm×6m의 나무토막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또한 석축과 층계와 주춧돌을 쌓는 석재는 3동의 건물에 든 것이 1천 입방m. 주로 울산에서 떼어다가 썼는데 경질이라서 회랑공사에 필요한 2천 입 방m는 의정부 것을 쓰기로 했다. 같은 화강암이지만 의정부 돌은 질이 훨씬 연해서 조각이 많은 석재로 가장 안성마춤이다. 이 밖에도 기와가 3만장.
나무 다루는 도 목에는 이광규씨, 석공에 김부관씨, 단청에 한석성씨 등 현존의 1급 기능 자들이 직접 지휘, 제작하고 있다. 각 건물에 동원된 인원을 보면 무 설전에 목수 4천명과 석공6천명 등 총 1만6천명, 비로 전에 목수3천명과 석공 3천명 등 총 7천8백 명, 관음전에 목수 2천7백 명과 석공 1천명 등 총 5천3백 명.
3동의 연인원 3만 명을 헤아리며 그 주위 정지·석축공사에 1만 명, 그리고 회랑건축에 소요될 3만 명을 합하면 이 불사에 동원되는 장인과 잡역부는 7만 명이 넘으리라는 계산이다.
그러나 당초에 중건할 사역에 대한 발굴·실측·조사작업과 자료수집 및 설계, 그리고 토 량 처리공사 및 목재·석재의 채집과 운송관계자들까지 상정한다면 두루 10만 명에 달하리라는 추정이다.

<각 시대특징의 건물>
불국사 중건공사는 68년 문공부에 의한 공사비 모금운동으로 비롯되었다고 그래서 재계시주 금 1억3천만 원을 기본 자산으로 하여 사단법인체가 구성되었는데 그밖에 국고와 지방교부세로 일부충당하고도 모자라 회랑용 목재는 일체 사찰측이 부담한다. 공사는 문화재관리국 주관 하에 현대건설이 시공하고 있다.
69년 8월에 착공하여 70년까지는 발굴실측 및 토 량 처리작업이 계속됐다.
그 한편으론 기본 설계도를 작성하고 또 일본에 김정기·김동현 양씨를 파견해 일본에 있어서의 고대목조건물을 조사하고, 국내적으로 신영훈·박종석 양씨가 각 사찰에서 자료를 모았다. 여기에서 얻어진 자료를 다시 별도 고증위원호의 검토를 거쳐 확정지어진 것이 지금의 고사내용이다.
가장 큰 무 설전은 맛 배 지붕 주심 포 집으로 하여 고려중기의 양식을 따르고 비로 전은 팔 작 지붕에 주심포로 하여 그보다 약간 뒤지는 시기의 양식으로 삼았다. 관음전은 더 늦은 시기의 이조초기 건물. 다색의 4각 집으로 하였는데 창살까지 금산사·대장 전·봉정사·화엄강당 등의 화사한 꽃 살 무늬를 적용하여 여간 우아한 집이 아니다.
불국사의 창건은 신라 경덕왕 때(756년) 이지만 현존 건물은 이조후기에 지은 것들이다. 대웅전과 극락전은 영조 때이며 자하문과 범영루의 마지막 중건은 숙종 즉18세기초이다. 무 설전·관음전·비로 전 및 회랑 역시 이조후기까지 서 있지만, 이번 복원은 그보다 훨씬 앞서 고려중기에서 이조 초에 걸치는 양식. 그것은 우리 나라 현존건물이 그 이상 소급할 수 없기 때문이며, 가능한 한 신라 때의 양식에 접근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조경의 일부인 연지복원은 차후의 숙제로 남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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