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자녀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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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아버지의 직업을 그대로 아들이 물려받던 시대는 이미 간 셈이다. 아직도 간혹 아버지의 의사나 병원을 물려받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아주 드문 일에 지나지 않는다.
요즈음 경향은 오히려 자기가 못한 것을 자녀에게 성취시킴으로써 간접으로 욕구충족을 꾀해보려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이때 소홀히 되기 쉬운 것이 자녀의 인권이나 적성에 대한 배려이다.
「피아노」에 별로 소질도 없는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하루 몇 시간씩 「피아노」연습을 강요당하고, 몸도 약한 아이가 태권도연습을 강요당하고 피만 봐도 질리는 아이가 읫과 대학 합격을 요구 당하는 등의 「난센스」가 벌어지게 마련이다. 자녀는 부모의 욕구충족을 위한 도구로 화해버리기 십상이니 이것도 비극이다.
미국 같은 사회에서도 자녀가 부모의 도구였던 시대가 있었다고 한다. 50년전만 해도 농촌에서는 자녀의 수가 부자의 척도였다고 한다. 왜냐 하면 그만큼 노동력이 풍부하여 보다 큰 수확을 가져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동서를 막론하고 문화의 변천이 급격하고 가족제도가 붕괴되어 가는 경향이 농후하여 부모자녀간에도 유대가 점점 약화되어 가는 것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인 것 같다. 자녀들도 부모의 도구로서 만족하기를 거부하고 각자 개성의 신장을 보다 중요시하는 시대가 오고있다.
내가 낳은 자식이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이미 낡은 생각이다. 물론 그것은 어느 시대에도 온당치 않은 생각이었겠지만 앞으로는 더욱 그렇게 될 것이다. 「카힐·지브랜」은 「예언자」라는 시집에서 다음과 같이 쓴바 있다.
『너희 어린이는 너희를 통해서 왔으되 너희에게로부터 온 것은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그리워하는 한 삶(대 생명)의 아들딸들이니라.
너희는 그들에게 너희 사랑을 줄지라도 너희 생각을 주려 고는 말아라. 그들에게는 그 들 자신의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가정이 본래 지니고있던 기능이 여러모로 약화되어 감에 따라 가정의 기능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재검토해 보게된다. 때로는 의·식·주 모든 문제를 가정을 떠나서도 해결 지을 수 있는 시대가 왔다. 가정은 물질문제의 해결장소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신적 유대를 위해서 더욱 필요한 장소가 되어가며 특히 어린이에게 사랑을 줌으로써 사랑을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케리·마이어스」의 「어머니의 기도」를 되새기는 것으로 새시대의 자녀관을 삼고싶다.
『아이들을 이해하고 아이들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고 묻는 말에 일일이 친절하게 대답하여 주도록 도와주소서. 면박을 주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소서. 아이들이 우리에게 공손히 대해주기를 바라는 것 같이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느꼈을 때 아이에게 잘못을 말하고 용서를 빌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아이들이 저지른 죄에 대해 비웃거나 창피를 주거나 놀리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들의 마음속에 비열함을 없애주시고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게 하여주소서.』 【주정일<숙대 교수·육아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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