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2)독일의 가족 찾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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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난주 서독을 방문, 서독의 무성의 한국담당관 「마투쉬카」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자유세계와 철의 장막 안 사람들 생각엔 쉽게 융합될 수 없는 큰 「갭」이 있다는 이야기를 실감나게 들었다. 「마투쉬카」씨는 제4차 대전 때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지금은 동독지역이 된 어느 작은 마을에서의 일이었다. 미 군기들이 독일열차를 공습했다. 열차에 타고 있던 독일사람들이 모두 철길 옆으로 뛰어내렸으나 기총 소사와 폭격으로 떼죽음의 수라장이 빚어졌다. 공습이 끝나고 보니 수라장 가운데 생후 몇 달된 아기가 길바닥에 버려져 있었다. 한 할머니가 그 아기를 버릴 수 없어서 데려다 길렀다. 전쟁이 끝났으나 독일은 동서로 딱 갈라서고 말았다.
해빙「무드」 속에 동서독간 대화가 시작되고 전쟁 때 헤어진 가족 찾기 운동이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열차를 타고 가다가 불의의 폭격으로 생후 몇 달밖에 안된 갓난아기를 잃었던 서독의 부모는 누구보다도 먼저 어린 아기의 사진을 들고 가족 찾기 본부로 찾아갔다. 보람이 있어서 몇 달 후 동독으로부터 통고가 왔다. 엇비슷한 남아에 관한 신상설명서와 함께 며칠 날 몇 시에 신병을 인수해 가라는 것이었다. 결국 그 청년은 20여 년만에 서독의 부모품 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꼭 죽은 줄만 알았던 아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 부모들은 기쁨에 몸부림쳤다. 하지만 그 청년은 담담할 뿐이었다. 부모는 모든 정성을 다해서 아들을 기쁘게 해 주었지만 그 청년은 갑작스런 서구의 생활환경에 적응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할머니가 있는 동독으로 가겠노라고 짐을 꾸리고 나서는 것이었다. 그에게 서독사회는 너무나 번잡하고 호화롭고 벅찼던 것이다. 그러나 동독으로 넘어갔던 그 청년은 며칠 후 쓸쓸히 되돌아왔다. 동독에서 추방한 것이었다. 서독의 자유의 훈풍을 맛 본 사람은 필요 없다고 추방한 것이었다. 이제 이 청년은 부모와 같이 살며 착실히 일해 행복한 자유시민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마투쉬카」씨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남북적십자 회담에도 언급, 장막에 가린 공산독재사회에서는 자유의 훈풍을 무엇보다도 두려워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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