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가는 아이들에 익숙해질 강심장은 없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엘하쥐 아씨 국장은 "나는 남을 도울 수 있는 특권을 받은 사람"이라고 했다.

엘하쥐 아씨(55) 유니세프(UNICEF·유엔아동기금) 공공재원조달국장의 왼쪽 양복 깃에는 걸어가는 사람 모양의 배지가 달려 있었다. 유니세프 배지가 아닌 이 빨간 배지를 그는 언제나 달고 다닌다고 했다.

 “1994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에이즈 퇴치를 위한 세계걷기대회 배지예요. 제겐 ‘연대(solidarity)’를 의미하죠. 20년 전엔 에이즈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는데, 이후 누구나 에이즈를 알고 약도 개발됐습니다.”

 당시 그는 아프리카 비정부기구 연합체인 ‘환경개발행동(ENDA)’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고국 세네갈에서 수많은 이들이 에이즈로 숨져가는 걸 봐야 했다. 함께 놀던 친구들도 있었다. “언제나 기억하려고 합니다. 그 친구도, 세계가 하나로 뭉쳐 연대할 수 있다는 것도요.”

 세네갈 다카르대에서 인문학 전공 후 독어독문학으로 석사를 받은 그는 오스트리아 그라츠대 인류사회학 특별연구원을 거쳐, 빈 외교아카데미를 졸업했다. 그리곤 세네갈로 돌아가 97년까지 10년간 ENDA에서 일했다. 이후 유엔개발계획(UNDP) 국장 등을 거쳐 2009년부터 유니세프에서 일하고 있다.

 지난달 27~30일 열린 유니세프와 한국 정부와의 연례협의차 방한한 그를 만났다. “유니세프에 도움을 주는 한국 정부와 국민들에게 감사하다”는 그는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가 된 한국의 노하우를 세계와 공유하는 방안도 연구 중”이라고 했다.

 - 한국의 성공을 언급하시는데.

 “어린이는 나라의 미래다. 한국은 5세 이하 영아 사망률을 획기적으로 낮췄고, 교육을 강화했다. 잘 교육받은 건강한 어린이들이 자라서 지금의 한국을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 최근 유엔의 주력 사업 분야는.

 “전 세계적으로 전쟁과 재해가 늘어나고 있다. 유니세프의 긴급구호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아졌다. 이젠 재난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게 어린이들을 진정으로 돕는 것이라는 생각들이 생겨나고 있다. 지역개발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이유다.”

 -유니세프 창설된 지 67년이 됐다. 많은 일들을 했지만 세계에는 고통받는 아이들이 너무 많지 않나.

 “모든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지구가 될 때까지 노력해야 한다. 충분하지 않다. 더 나아가야 한다. 그래도 그동안 예방접종 비율이 높아졌고, 많은 학생들이 학교에 갈 수 있게 됐다.”

 - 고국 세네갈 어린이들에 대한 애틋함이 남다를 것 같은데.

 “그렇다. 애정과 사명감이 크다. 오스트리아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한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의 지구, 하나의 인류(One World, One Humanity)’를 모토로 하는 유니세프는 전 세계 어린이들을 돕는 국제기구다. 세상의 고통받는 모든 어린이들은 내 나라의 어린이들과 똑같다.”

 - 유니세프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한국 젊은이들이 많다.

 “죽어가는 아이들을 보는 건 절대로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무리 여러번 본다 해도 마찬가지다.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사명감과 열정, 강인한 정신력이 있어야 한다.”

 - 가장 보람있는 일을 꼽는다면.

 “ 죽어가던 아이가 유니세프의 지원으로 회복해 뛰어다니는 모습을 볼 때면 행복하다. 그럴 땐 내가 남을 도울 수 있는 특권을 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글·사진=박혜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