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지가 춤추는 남북회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가족을 찾기 위한 남북회담 본 회담준비를 위한 여덟 차례 예비회담이 계속됐지만 한 문제에서 제자리걸음하고 있다. 걸려있는 문제는 출발했던 때의 뜻 그대로 가족을 찾자는 한적의 추장과 친척·친우도 포함시켜야 한다는 북적 주장.
이 문제는 5차 회담이래 논쟁이 반복됐다. 5차 회담에서 북적의 김태희는『우리 안에 동의하시오』라면서 무려 70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했다. 7차 회담에서도 김태희는 핏대를 올리며『불쾌합니다』를 연발했다. 그러나 11일 열렸던 8차 회담은 궁중요리를 차려놓고 건배를 나누면서도 몹시 딱딱했던 7차 회담 때와는 달리 휴식도 없이 1시간 반만에 끝났다. 예비회담이 시작된 이래 첫 회담을 빼고는 가장 짧은 것이었다.
8차 회담의 주제 역시 남북간에 찾을 사람들의 범위.
북의 김태희 『동료끼리 만나는데 무슨 절차가 필요하며 가족에 국한할 것은 뭐 있소. 친우의 정의가 애매하여 5천만 민족이 모두 친우가 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묻고 있지만 그런 것은 아니다』 고했다.
이에 대해 한적의 김연주 수석대표는『그렇다면 남쪽에서 이북의 가족을 찾으러 성급하게 갔는데 찾으려는 가족이 죽고 없다면 얼마나 허망하겠는가. 그러니 우선 생사와 소재부터 알아야 되지 않겠소. 모든 일에 순서가 있는 법인데 동포끼리 무슨 절차를 따지느냐지만 그런 귀하의 말은 26년 장벽의 냉엄한 현실을 무시한 무책임한 발언이요』라고 반박했다.
결국 김연주 수석이『친척·친우문제도 본 회담에서 토의할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고 말하자 북은 말꼬리를 잡아 북의 김태희는『우리(북)안에 동의한데대해 환영하는바 이다』고 성급히 못을 박으려고도 했다.
이런 논쟁에서 볼 수 있듯 한적은 신중히 단계적으로 실현성 있는 문제를 제기해 가는 반면 북은 현실적인 것보다는 성급히 비약하려들고 정치적 성격으로 변질시키려는 선전공세에 열중해 있어 회담의 앞길에 검은 그림자를 던지고있다.
그러나 우리 대표단을 현지에서 리드하고 있는 장우주 사무총장은 8차 회담이 끝난 뒤 9차 회담에선 가족과 친우의 갈린 문제를 결말 날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8차 회담은「쪽지회담」이라 불릴 만큼 쪽지가 난무했던 것이 특징의 하나. 수석대표끼리 말을 주고받는 동안 양쪽에 앉은 4명씩 8명의 대표들은 부지런히「메모」쪽지를 주고받았다. 11시에 시작된 회담이 12시45분에 끝날 무렵엔 마감에 쫓긴(?) 10여개의 쪽지가「지그재그」로 난비하기도 했다.
쪽지를 받아 쥔 쪽에선「테이블」밑에서 종이를 펴보고 픽 웃기도 하고 재깍 회답을 써서 담배와 함께 상대방에게 권하기도 하는데 북적의 김태희는 종이쪽지가 오가는 것이 우스꽝스러웠던지 『남북의 자유로운 서신왕래가 이루어지고 있군요』라고 멋 적게 웃었다. 쪽지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어떤 것은 『오늘은 그만 합시다』로부터『옆방에 음식 준비돼 있으니 쉬었다합시다』에 이르기까지 가지가지. 쪽지 공세는「테이블」을 넘기기도 하고 자기네 대표끼리 건네기도 하고 돌려가며 보는 회관형도 있는가 하면 OX나 가부의사를 묻는 택일형과 선다형도 있다.
때로는 쪽지가 회담장 창 밖으로 릴레이식으로 빠져나가는 앙 결재형도 있고 반대로 창 밖으로부터 날아드는 지령형 등이 엇갈려 남북회담은 날이 갈수록 가위『쪽지는 춤춘다』로-.
회담장 주변의 모습도 차차 달라져 간다. 회담초기 북적은 차 나르는 일까지 낭자일색이었고 한적은 미니 아가씨로 대조를 이뤘다.
그러나 다음단계에서 북적의 차 나르는 일은 긴 롱치마를 입은 중년여인, 또 그 다음은 무릎에와 닿는 훨씬 짧은치마를 입은·젊은 여자, 그러던 것이 8차 회담에선 그 짧은치마가 북을 기준으로 보면 무던히 화사한 무늬가 있는 치마로 바뀌었다.
이런걸 두고 우리가 북에 흘러보내는 자유화의 물결이랄 수도 있을 것 같다.
여담이지만 8차 회담 때 회의장 옆에 우리 쪽 S제과가 선사한 빵과 과자가 돌아갔는데 빵을 맛있게 먹던 북의 기자 한 사람이 포장지를 물끄러미 들여다 보더니『이건 뭐야, 먹는 데까지 반공이야』라고 했다.
알고 본즉 과자를 싼 종이에 반공방첩이라고 새겨져있었는데 우리측 기자 한 사람이 『이 사람 반공을 다짐했군』하고 웃기도 했다.
남북회담은 외교에도 영향을 준다. 올 유엔 종합에서 한국문제 토의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데도 남북회담은 본 설득자료가 되었다.
미주·아주·중남미·「아프리카」등 각 지역에 파견된 친선사령관은『한국문제의 궁극적인 목표는 통한이고, 이를 위해 현재 남북한 적십자 사이에 순수한 인도적 견지에서 회담을 하고 있는 만큼 매년 냉전의「이수」로 등장되고 있는 한국문제는 이러한 남북회담의 발전 과정을 지켜본 뒤 토의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설득작전을 폈으며, 이 같은 설득이 주효했던 것. <최규장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