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제21화>미·소 공동위원회|문제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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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문제안씨는 8·15전에 서울 중앙방송국에서 아나운서로 활약, 한국 최초의 방송기자로서 8·15해방의 순간, 미·소 공동위원회 등 역사적인 사건을 직접 취재 보도했으며, 오랜 언론인 생활을 거쳐 현재 한글전용 추진회 사무국장으로 한글운동을 하는 한편 이화여자대학교 시청각교육연구원에서 교육영화를 제작하고 있음. 【편집자 주】

<프롤로그>
l945년10월22일은 8·15해방 못지 않게 중대한 뜻을 지닌 날이다. 8·15가 다시없는 기쁨의 소식이었다며는, 10월22일, 그날의 뉴스는 우리에게 다시없는 가시밭길을 가져다준 비운의 첫 신호였다.
그러나 27년이 지난 지금 누구 하나 기억하지도 못하는, 그날의 그 뉴스는 그 당시 신문·방송에서 보도했어도 사실은 민중들에게는 그다지 크게 반영되지 못했었다.
그것이 해방 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6·25를 치르고 유리분산의 쓰라림을 되풀이하고 있는 우리의 모든 고난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는 전국민의 관심이 여기에 집중되지 못했었다.
만일에 정말 만일에 그때 남북의 모든 지도자가 한데 뭉쳐서 결사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했었던들 북에서는 소련군의 의사를 물리치고, 남에서는 미군의 의사를 물리기고 분연히 떨쳐 일어날수만 있었던들…아마도 오늘의 역사는 많이 변했을 것이다.
그때 우리 국민들에게 세상을 알고 앞날을 내어다 보는 슬기와 굳게 뭉치는 단결력과 절벽을 뚫는 용기가 있었더라면…생각만 해도 안타깝고 아쉬운 일이었다.
1945년10월22일은 월요일이었다. 전날 밤 방송국에 와있던 미군 방송 감독관들은 워싱턴 발 외신의 내용을 알고 있었고, 또 미군 고위당국으로부터 전달받아서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전 날-즉 21일 미국의 현지시간으로는 20일에 미국외교정책 협의회에서 연설한 미국 국무성 극동부장 「브인센트」씨의 연설문 전문이었다.
그 연설문 가운데 한국에 관한 부분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조선에 대해서는 조선에 신탁관리제를 수립함에 앞서서, 우선 소련과의 사이에 의사를 소통한 다음, 허다한 정치 문제를 해결시키고 싶다. 조선은 다년간 일본에 예속되었던 관계로 지금 당장 자치를 행할 준비는 되어있지 않다.
따라서 미국은 우선 신탁관리제를 실시해서, 그 동안에 조선민중이 독립해서 통치를 할 수 있도록 준비를 진행할 것을 제창한다. 미국은 조선을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독립한 민주주의적인 국가로 만들 작정이다.』
이러한 내용의 연설문을, 서울 중앙방송국에 와있던 미군 방송감독관은 10월22일 아침 우리(당시 서울중앙방송국 보도 관계자)들이 출근하자마자 방송과장 이계원씨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하고 10시 뉴스 시간부터 방송하라는 것이었다.
그 당시 방송국에는 박경원 최경환 두 분이 영문을 우리말로 번역해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우선 10시에 서울 중앙방송국의 전파(당시의 JODK)를 통해서 전국에 알리고, 이어 11시30분에 나갈 뉴스 시간에는 한국 사람의 의견을 들어서 함께 방송하자고 했다.
그러나 미군 감독관들은 사실만 보도하고 이에 대한 견해는 보도할 것도 없고, 처음부터 취재할 것도 없다고 고집했다.
결국 서울 중앙방송국은 「브인센트」씨의 연설문 전문만을 24일까지 계속해서 뉴스 시간마다 방송을 했다.
편집을 담당했던 필자 자신도 몇 번인가 검열관에게 건의했으나 통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미군감독관의 검열권이 미치지 못하는 서울의 신문들조차도 연설문 전문만을 보도하고 이에 대한 한국 사람의 견해는 전혀 싣지 않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는 해방 된지 두 달밖에 안되었고, 미군이 진주해 들어 온지 한달 반도 채 안된 때이라, 그럴 것이 기쁜 일 뿐이고 만나는 사람마다 반갑고 보는 것마다 희망적이어서, 이 「브인센트」 극동부장의 신탁관리제실시 예정의 연설문도 그 내용을 신중히 검토할 생각 없이 그냥 그대로 반가운 소식으로서 들어 넘기고 말았던 모양이다.
물론 이 뉴스 이전에 카이로 회담이나 포츠담 선언에도 「즉각 독립」이 보장되어 있지 않았었던 만큼, 이에 대해서도 검토했었어야 했었겠지마는 직접 「신탁관리제」를 실시하겠다는 소식마저도 비판 없이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말았다.
이 「브인센트」 발언의 뜻은 컸지만, 이튿날인 23일 귀국 후 첫 기자회견을 가진 이승만 박사도 「신탁통치란 일국의 통치하에 있던 나라를 관리하는 것인데 우리는 우리 할 일만 급속히 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고 가볍게 넘겨 버린 것이었다.
이 22일의 한 줄 외신보도가 파란 많은 미·소 공동위원회의 실마리가 될 줄은 그때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계속><제자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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