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6·25 21주 3천여의 증인회견 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유엔군의 총퇴각(14) |1·4후퇴(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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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4 후퇴 때의 전국적인 피난민 총수는 대략 2백 20만으로 추산되었다. 낙동강 공방전 때와는 달리 이때의 적 진격은 대체로 오산∼제천∼영월∼삼척선에서 저지되어 피난민들을 각지에 분산 수용할 수 있었다.
만약 이때에도 중공군이 낙동강까지 쇄도했더라면 엄동 하에 피난민들은 무수한 희생자가 생겼을 것이다. 적의 남침을 앞서의 선에서 막은 것은 신임 리지웨이 8군 사령관의 꿋꿋한 태도와 함께 그가 안출한 『출혈작전』(Operation Kiler)이 주효했기 때문이었다.
유엔군이 반발을 개시하여 영등포를 탈환한 2월 10일 현재의 피난민수용 분포를 보면, 공 6만, 아산일대 27만, 평택 10만, 천안 30만, 청주 15만, 충주 5만, 괴산 5만, 보은 40만, 경북북도 47만, 울산 12만, 부산일대 30만이었다.
이런 방대한 피난민을 수송하는 것도 큰 문제였지만 이들을 수용 구호하는데는 더 힘이 들었다.
그럼 다시 이들 피난민의 「수송구호작전」에 관계했던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겠다.

<영국 가서 배운 것 활용하라>
▲김학훈씨(당시 사회부촉탁·현 대한적십자사사무총장·56)<그때 내가 맡은 일은 피난민 구호사업이었습니다.
나는 50년 4월 경기도사회과장으로 영국에 유학 갔다가 그해 12월초에 귀국했어요. 전에는 안면이 없던 허정 장관이 불러서 갔더니 「영국서 배운 구호사업교육을 우리 피난민을 위해 사용하라」고 합디다. 즉시 응낙하고 허 장관에게 난민구호대책으로 다음 세 가지를 건의했어요. 첫째 평시체제의 행정기구를 전시체제로 바꾸고, 둘째 피난민 행로와 군용도로를 구분해 군 작전에 지장이 없게 하는 동시 요소요소에 구호센터를 설치할 것, 셋째 구호관계업무를 일원화할 것 등이었어요.
허 장관은 이 건의를 그대로 받아들여 사회부에 구호대책본부가 설치되고 각 국과를 통합해서 구호반·물자반·후생반·수송반·섭외반·총무반·기획반 등으로 개편했습니다. 대책본부의 실무책임자는 나와 박준섭(사회국장·고) 손정학(사회과장·현 결핵협회사무총장) 오재경(현 기독교방송사장) 설국환(그레이하운드사장) 강봉수(현 산림청장) 제씨였지요. 그 당시 사회부직원은 약 50명밖에 안됐지만 각 부처에서 많이 차출돼와서 인원은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본격적인 서울철수는 12월 27, 28일께부터 시작됐는데 내무·국방부의 협조를 얻어 난민수송에 모든 수단을 다했어요. 기차·화차·트럭·각종선박 등을 동원해서 우선적으로 피난민을 실었지요.
나는 1월 4일에 구호반의 박주환(재미) 김순교(외무연구원) 윤명환(사업)씨 등과 함께 피난민 대열에 끼여 남하했습니다. 피난민수송과 구호에 미흡한 점도 많았지만 평양철수 등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희생자가 적었던 것은 요소요소에 설치한 구호센터 덕분이었지요. 서울에서 대전을 거쳐 광주·목포로 가는 길과 부산으로 가는 길에 약 50개의 구호센터를 마련했어요. 이곳에는 사회부의 구호반원이 대기했다가 양곡과 숙소를 제공하고 환자도 돌보았어요. 그리고 수용소에 정착한 난민들은 통반으로 조직하는 등 난민구호에 정부로서는 최선을 다한 셈이지요.>

<동해안·산악지대선 희생자도>
▲김원규씨(당시사회부구속계장·현 노동청차장·55)<6·25직후 국제적인 피난민구호사업이 계획된 것은 1·4후퇴 직전입니다. 유엔 민사원조처가 생겨 반도호텔에 사무실을 차리고 외국에서 구호양곡과 약품이 들어온 것도 이 무렵이었지요. 이때 외국서 원조해준 양곡 등 구호물자는 약 4백만명분 정도로 기억돼요. 난민수송은 노약자·고아원·양로원수용자들에 우선권을 주었어요.
우리 구호반은 수원·대전·목포·부산 등지로 이르는 요소에 구호센터를 설치했어요. 드럼통에 우유가루를 담아두고 피난민이 도착하면 더운물에 타주고, 옷과 모포도 나누어주었지요. 그래서 그 추위에도 굶거나 얼어죽은 난민은 별로 없었습니다. 사회부의 피난민대책본부는 1월 4일에 서울을 철수했는데 허정 장관은 부산에서, 최창순 차관은 대구에서 각각 난민구호를 지휘했어요. 대구에 갔던 나는 1월 하순께에 다시 수원에 올라와 남수동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구호활동을 하다가 3월 하순에 서울로 복귀했습니다.>
정부에서 이렇게 난민수송과 구호에 온갖 힘을 기울였지만 워낙 수가 많고 겨울이어서 희생자도 생겼다. 특히 동해안과 중부산악지대의 주민들은 대부분이 도보로 남하했기 때문에 아사동사의 참경도 벌어졌다. 또한 혼란의 와중에서 한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경우도 많았다. 다음은 그런 한 예.

<화차 지붕 위서 교대로 불침번>
▲권당혁씨(당시천안중학생·현 사업·37)<1월 6일에 우리 일곱 식구는 7살 짜리 누이동생까지 보따리를 이고 천안 역으로 나갔습니다. 지붕까지 빽빽이 올라탄 피난민열차가 저녁에야 역에 닿았는데 그야말로 결사적으로 기어올랐어요. 열차의 지붕 위에서 우리가족은 서로 부둥켜안고 입김으로 몸을 눅였지요. 밤이 깊어지니까 졸다가 떨어져 죽은 사람도 있었어요. 우리가족은 불침번을 정해놓고 2명씩 교대로 자면서 안자는 가족이 꼭 붙들었어요.
그러나 새벽에 차가 왜관에 머물렀을 때 그만 나는 변을 당했어요. 자고 일어나 눈을 비비며 움직이다가 화차지붕 위에서 떨어져 엉덩이뼈가 부러졌어요. 대구 역에서 내려 아버지 등에 업혀 이틀만에 겨우 달성외가댁으로 갔습니다. 어린 동생들은 모두 발이 부어 터지고 잠도 못 자고 배가 고프니까 걸음을 못 걸어요.
아버지도 무거운 나를 업고 몇 번이나 넘어지시구요. 나는 이때 상한 다리를 제대로 치료를 못 받아 지금도 한쪽다리를 저는 부패의 몸이 됐습니다.>
한편 1·4후퇴로 정세가 암담한 무렵, 유엔군이 한국에서 완전 철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일부 인사들이 약 1백만명의 한국인을 일본으로 이동시키려는 계획을 세운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김용주씨(당시주일대표부공사·현 전남방직 대표이사·67)<12월 하순에 유엔군이 서울도 포기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러다가는 미군이 모두 일단 일목으로 철수했다가 다시 한반도에 상륙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디다. 맥아더 사령부로 달려가 참모부장 「도일·히키」소장을 만나 이점을 물어봤더니 자기도 모른다면서 현재 어느 선까지 철수한다는 계획은 없고 앞으로 정세를 보아야겠다는 거예요. 일본까지 철수한다면 앞으로 반격 때에 필요한 우리 한국인재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최소 1백만명은 일본으로 이동시켜야겠다고 생각하고 히키 소장에게 말했더니 좋은 계획이라면서 최대한의 협조를 하겠다는 거예요. 미국동해군사령관 터너·조이 제독과 미 공군사령관 스트레이트메이어 중장도 모두 편의를 보아주겠다는 거구요.
나는 일본정부의 승인도 얻어야했기에 강기 외무차관에게 북 구주지방에 1백만명정도 수용할 수 있는 땅을 빌어달라고 했더니 자기로서는 권한 밖의 중대사니 길전 수상에게 얘기하라고 합디다. 그러면서 길전 수상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으로 고도와 바바 두 사람을 소개해주어 만났더니 둘이다 일본이 한국에 속죄할 기회가 왔다면서 적극적으로 움직이겠다고 약속해요. 이렇게 해놓고 12월 24일에 이승만대통령에게 그동안의 경위를 서신으로 소상히 보고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회답이 없어요.

<트루먼 성명으로 이동설 취소>
이래서 51년 1월 8일에 미군용기를 얻어 타고 부산으로 가서 이대통령을 직접 뵙고 이야기를 했어요. 대통령은 별로 신통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왜 마음대로 임지를 떠났느냐고 오히려 나무래요. 이날하오에 무초 대사를 만났더니 일개 공관장으로 대통령의 사전승낙도 없이 그런 큰 일을 외국정부와 교섭했느냐고 노발대발이에요. 나도 홧김에 당신도 한국사람이 돼서 한번 생각해보라고 언성을 높였습니다.
무초가 이렇게 강경히 나오는 것을 보고 미국이 한국을 버리지 않는다는 무슨 보장이 있는 것 같은 생각도 들더군요. 아니나다를까 1월 10일에 미국은 한국서 철수 않는다는 트루먼 성명이 나옵디다. 이래서 1백만 이동 계획은 필요 없게 됐지요. 이날오후에 이대통령을 뵙고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고 사과했더니 그저 빨리 임지로 돌아가라고만 하시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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