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삼국사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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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한국 사학계는 8백여년 전에 처음 우리 나라 역사를 정리해 편찬한 김부식의 공죄를 둘러싸고 매우 신중한 토의를 벌이고 있다. 한국사 연구회는 18일 한국연구원서 열린 월례발표회에서 「삼국사기」의 기술이 자주성을 잃음으로 말미암아 한국사에 커다란 죄과를 저질렀다고 지적했으며, 특히 그것은 오늘날의 외래문화 수용태도와 비견된다는 점에서 신랄하게 비판되었다.
우리 나라 고대흥망사 연구에 다시없는 최고의 저술인 「삼국사기」에 대한 이 같은 비판은 김부식이 투철한 역사의식 없이 편찬함으로써 막상 중요한 기록을 심지 않았다는 김철준 교수(서울대문리대)의 발표로 비롯되었으며, 이어 관계학자들의 토론에서도 같은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물론 김부식의 그 편찬동기가 중국의 사서에 못지 않은 것을 만들어 놓기 위한 것이 아니었겠느냐, 혹은 당시 고려 인종 때의 사회상황에서 불가피했던 게 아니냐는 반문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유교적 사대주의에 빠져 사실의 제시가 부족하고 있는 사료마저 개채 은폐시키는 결과가 됐다는 점에 의견을 모았다.
김철준 교수는 『김부식의 사관에 대하여』란 발표를 통하여 사학계의 중견 고병익 교수의 논문에 불만스러워 새삼 재론케 된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만 유교적 「이데올로기」를 확립하기 위한 저술이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사료를 묵살하거나 개서했는데 거기서 어떻게 자주성을 운운할 수 있느냐』고 반박했다. 그는 고 교수의 견해와는 달리 앞서 「삼국사기」에 비판적이었던 단재 신채호 씨의 태도가 옳다는 주장이다.
근자에 발표한 고 교수의 논문은 「삼국사기」가 중국사기의 형식을 그대로 따른 것이고, 김부식이 이미 사대적으로 기록된 고전의 자료를 옮겨 쓴데 불과할 뿐 사료의 인멸이나 개서로 보긴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 교수는 『역사에 쓰인 사소한 문제나 간단한 용어만 가지고 자주성을 운운한다는 것은 위험한 속단이며 도리어 자주적 사관을 가지고 앞을 내다보는 문화의 방향제시를 주목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김 교수는 「삼국사기」의 과오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김부식은 거란 침입 후 문무신의 대립에서 권력을 휘어잡은 문신이다. 1차로 이자겸 일파·척준경 일파를 타도하고, 다시 묘청의 난에 관련 있는 정지상을 물리친 뒤 한국의 역사를 경리, 1145년에 「삼국사기」를 편찬했다.
고려조는 본시 신라 때의 골품제도를 없애고 새로 친족제도를 채택하는 한편 중국의 제도와 문물을 직수입하여 적용시키는 처지였다. 그러니 만큼 도전적으로 집권자가 된 유학자 김부식은 자기 입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유교적이고 모화적인 역사기술이 불가피했는지 모른다고 점은 고의정적이던 묘청 일파가 불교를 바탕으로 도참설을 내세운 것과 아주 상반된다.
어쨌든 김부식은 역사를 정사체로 간추릴 때 정치적인 면에만 치중한 나머지 설화와 기타 사회적 기사를 일체 빼버렸다. 토속적 표현의 설화로서 전해오는 고대역사를 정사체로 말끔히 간추리면 탈락되는 게 많은 터인데 다시 유교적 사고로 여과함에 따라 『수록된 사료마저 그 성격에 「페인트」칠을 해 버리는 결과』가 된 것이다.
그래서 「삼국사기」는 일연의 「삼국유사」와 비교해도 누락된 기사가 허다하다. 가락국기·동명옥편·김유신열전·화랑도에 관한 것 등의 본모습을 상고하는데는 삼국사기보다 오히려 삼국유사를 통해 그 바탕을 찾아볼 만하다. 삼국사기는 정중하고 세련된 문장으로 대의명분만 세운 반면에 사실과 사회상을 소홀했고 인간적인 면이 전혀 드러나 있지 않다.
김 교수는 『김부식 류의 이 같은 모순을 당시 지배층의 문화를 입증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더 극화됨에 따라 여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모순이 지적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이종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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