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루시초프 장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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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모스크바13일 로이터동화】소련을 11년 동안 지배하면서 평화 공존의 길을 닦아 놓았던 전 소련 공산당 제1서기 겸 수상 「니키타·세르게이에비치·흐루시초프」는 13일 아무런 공식 행사나 장례식도 없이 모스크바 교외의 노보데비치 묘지에 촉촉히 옷깃을 적시는 가을비속에 쓸쓸히 묻혔다.
7년전 그를 권좌에서 추방했던 소련 지도자들은 그의 묘에 커다란 화환을 보내고 당 기관지 「프라우다」에 부고를 내어 애도의 뜻을 표했으나 약2백명이 넘는 조객 속에서 그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 11일 심장마비로 숨을 거둔 「흐루시초프」의 유해는 이날 「크렘린」병원 시체 안치소에서 간략한 영결식을 거쳐 입관된 다음 「모스크바」교외의 「노보데비치」묘지로 가을비를 맞으며 운구되어 묻혔으며 매장 후 세워진 그의 묘비는 다음과 같았다.
「흐루시초프·니키타·세르게이에비치」(1894년4월17일-1971년9월11일)
소련경찰 및 보안관들은 일반 조객들의 출입을 막았으며 조객 중 약 반이 외국인 기자 및 외교 사절들이었는데 소련 자유주의 세력의 기수로 알려진 「표트르·야키르」는 경찰에 체포되어 장례에 참석치 못했으며 시인 「예프게니·예프투셴코」는 조객 사이에 끼여 조의를 표했다.
묘지에서 있은 간단한 영결식에서 고인의 아들 「세르게이·흐루시초프」(36)는 『우리는 세계의 신문들이 거의 예외 없이 쓴 위대한 정치인을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이것은 역사 및 언론에 맡겨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는 말씀드릴 수 있읍니다. 고인은 결코 무관심 속에 가지는 않았습니다. 고인을 사랑했던 이도 많고 증오했던 이도 많았지만 그에게 무관심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고인은 자신을 한 인간이라 부를 권리를 갖고 있었읍니다』고 애끊는 추도를 했다.
「흐루시초프」의 관이 묻히는 동안 미망인 「니나·페트로프」여사는 입술을 깨물었으며 두 딸 「라다」와 「유리아」, 사위였던 정부 기관지 「이즈베스티야」의 전 편집인 「알렉세이·아주베이」 등 유족들은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묘지에는 커다란 화환이 네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유족의 것, 두번째는 공산당 중앙위 및 각료 회의가 보낸 것, 세번째는 「동지 일동」이 보낸 것, 네번째는 고인의 동료였던 전 소련 국가 원수 「아나스타스·미코얀」이 보낸 것이었고, 이밖에 수백 개의 국화 꽃다발들이 묘 앞에 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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