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유진·이스토민」 피아니스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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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음악평이 까다롭기로 손꼽히는 영국에서까지 현대 세계 초유의 이상적인 「피아노·트리오」라는 찬사를 받은 피아니스트 「유진·이스토민」, 「바이얼린」의 「아이작·스턴」과 「첼로」의 「레너드·로즈」는 명실공히 각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현역의 독주가다.
그들은 이 같은 바쁜 독주 생활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매년 1개월간 「트리오」연주에 열중하고 있는 미국 악단의 선봉으로 세계 부대를 누비는 유일한 실내악의 명인들이다.
연주 경륜으로나 나이(40∼50대)로 보아도 지금 한창 음악 예술의 원숙기에 접어든 그들의 명 연주를 직접 듣게 된 것은 우리 악단 이번 「시즌」의 큰 경사라고 서슴지 않고 단언할 수 있다.
현대 「피아노·트리오」의 개화는 1920년대에 파리를 중심으로 당시 전성기에 있던 「피아노」의 「콜토」, 「바이얼린」의 「티보」와 현존하는 「첼로」의 거장 「카잘스」의 명 트리오가 각 악기의 다채로운 표현과 예술의 심오한 경지를 개척하였다. 그러나 그후 「카잘스」 개인에 얽힌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1933년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열린 브람스의 1백년 음악제 연극을 마지막으로 그 명콤비의 「트리오」는 영원히 들을 수 없게 되었다.
1950년 남불 프라드에서 카잘스를 아끼고 그의 음악에 경의를 표하는 거물급의 음악가들이 모여서 그의 부활을 위한 「카잘스」 음악제를 열었을 때 약관 25세의 「피아니스트」 「이스토민」이 선발되어 노장 「카잘스」와 「베토벤」의 「소나타」를 협연하였는데 그후「이스토민」은 매년 중미 「푸에르토리코」음악제에서 「카잘스」와 「피아노·트리오」 「소나타」 등을 연주하여 국제적인 이목을 집중하는 한편 그의 명성을 굳혔다.
「바이얼린」의 「스턴」은 67년에도 내한 연주하여 우리 악단에는 잘 알려진 거장이며 또 한사람 「레너드·로즈」는 우리에게는 초면이지만 미국 「첼로」계에서는 거성이다. 그는 현재 「줄리어드」와 「커티스」음악원에서·교수(「첼리스트」정명화양의 은사이기도 하다)로 있으면서 「솔리스트」로도 활약하고 있다.
이들 세 명수는 모두 순전히 미국에서만 음악교육을 받고(전자는 「샌프란시스코」. 후자 둘은 「커티스」음악원 출신) 성장한 세계적인 거장급이라는데 특색이 있다. 「스턴」과 「로즈」에 관해서는 다음 회에 소개하기로 되었으니 여기서는 우선 「유진·이스토민」만 소개한다. 2차 대전 후 미국 악단에 혜성처럼 나타난 「이스토민」은 뉴요크 태생으로 러시아계와 성악가인 양친의 연주 여행을 따라다니며 4세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고, 6세때는 벌써 어머니의, 반주도 했다 한다.
그후 「줄리어드」에서 리스트의 고제인 「시로티」와 「커티스」에서 「피아노」의 거장「루돌프·제르킨」에게 사사하여 기묘한 기교와 음악적인 예풍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이스토민」의 독자적인 신선한 감각과 높은 지성과 투명한 서정성은 그의 연주에 한층 더 안정감을 첨가하여 주었다.
대전 후 미국의 유망한 삼총사 「피아니스트」로 손꼽히던 귀재 「윌리엄·카펠」이 1953년 여객기 추락 사고로 31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유진·리스트」는 연주가의 고민을 이겨내지 못한 채 중단 상태이고 오로지 「이스토민」만이 「필라델피아」 관현악단 청년 「콩쿠르」에서 우승, 「오르만디」지휘로 「쇼펭」 「피아노」협주곡 제2번을 연주하여 「데뷔」한 후 구미의 주요한 교향악단과의 협연과 독주회로, 또 정기적인 「피아노·트리오」와 「레코드」 취입으로 활동하였다. 1968년에는 유진·오르만디의 「필라델피아」교향악단과 「레너드·번스틴」의 「뉴요크·필하모닉」과 그의 데뷔 25주년 기념 연주를 가져 『폭 넓고 박력 있는 의심할 여지없는 진실한 음악가』라는 절찬을 받았다. 그의 대표적인 「레코드」로는 역시 오르만디와의 협연인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과 스턴 「로즈」와 연주한 「베토벤」의 「피아노·트리오」(태공)가 절묘한 명연으로 꼽히고 있다.
오는 21일 밤 이 명「트리오」의 음악적인 진가를 무대에서 듣는 기쁨을 크게 기대한다. 【백악호<서울대음대교수·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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