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북의 혈육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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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아버지에게>(전 연대상경대학장 이순탁씨)
아버지! 21년이래 조용히 불러본 이름입니다. 안녕하셨습니까? 아버지. 저희들 식구는 기적적으로 모두 6·25의 전화를 면하고 잘 있읍니다.
아버님과 제가 신촌역전에서 헤어질 때 『식구들은 별일 없니?』하시던 단 한마디의 말씀이 제게는 지금껏 두고두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어 일정시대 사상범으로 형무소에 계실 때 아버님이 같은 방에 수감되었던 분들에게 『가족걱정을 하면 안 된다!』고 타이르셨었다는 말씀을 상기하며 아직은 살아 계시는 줄 압니다.
저는 오늘 아침 출근하면서 멀리 연세대 뒷산을 바라보며 아버님과 함께 그 산 위에 올랐던 일과 거기서 제게 하시던 말씀이 회상됩니다. 산은 변하지 않는 것이라 하셨지요. 그리고 이어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산은 곧 변치 못하는 것이라 믿음은 어리석다 하셨고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사람이 귀하다』 하셨었지요.
저는 이 말씀이 성서의 「로마」서에 있는 귀절이었다는 사실을 이번 광복절날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서야 알았습니다. 아버님과 헤어진지 몇 해가 되었습니까. 그런데 그 말씀의 참뜻을 비로소 알게 되었던 바로 다음날 밤에 또 이런 편지를 쓰게 되었다는 점은 거짓말처럼 참으로 묘하고도 묘한 일인가 싶읍니다.
아버님의 참 소식을 알고 친히 뵐 수 있는 날을 기다리는 마음은 안타깝고 괴로운 일입니다만 그러나 기다리겠습니다. 이러한 소원은 그 어느 누구인들 막을 수 없고 죽음인들 막을 길 없는 남북으로 흩어진 모든 가족들의 소원입니다. 저는 이제 이러한 글월이나마 드릴 수 있게된 일도 아버님을 잃은 21년간의 절망 속에서, 그러나 소망을 잊지 않고 이날이 있을 것을 굳게 믿은 결과라 압니다.
지금 이 편지를 적는 제 옆에는 꼬마 셋이 저를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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