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남과 북의 포로수용소(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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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중공군은 잡은 한국군 포로를 일정한기간 억류하고 있다가 모두 북괴측에 인계 관리케 했다. 포로들은 중공군에 잡혀 있는 동안에도 고생이 막심했지만, 모든 시련과 고난은 북괴 측에 인계되면서부터 시작됐다. 동족인데도 중공군보다 괴뢰군이 몇 갑절 더 잔인 포악했다는 것은 송환자들의 일치된 견해였다.
또한 그들은 포로대우를 제대로 못하는 것은 순전히 『미군침략과 폭격』때문이라는 엉뚱한 선동선전도 잊지 않았는데 일부 무식층 포로 중에는 그런 선전에 넘어가 변절배신자가 생기기도 했다.
전회에 이어 이기봉 하사의 경우를 계속 들어보겠다.

<장교들 사병으로 신분 감춰>

<괴뢰군들은 동족이면서도 포로대우가 중공군보다 표독스럽고 가혹했어요. 행군하는 동안 걷지 못하는 중상포로들은 가려내어. 사살, 눈구덩이 속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렸어요. 온정리와 초산사이의 「개고개」에서 일차 학살이 있었는데 내 눈으로 본 것만도 10여명이나 됩니다. 그들은 국군포로를 약3천명씩 3개 연대로 편성해서 몰고 갔어요. 1개 연대는 천마로, 또 1연대는 초산의 화풍으로, 나머지는 벽장으로 갈라졌어요. 나는 악명 높은 소위 화풍수용소로 갔는데 말이 수용소지 시설이라고는 전혀 없어요. 아연광산 일대의 토굴과 광부들이 묵던 간역숙박시설, 화전민촌 등이 수용시설의 전부예요. 초산은 만주만큼이나 추운데 특히 아연광산굴 속은 뼈를 깎듯이 차요.
우리는 굴속에 옥수수 대와 지푸라기 통을 깔아놓고 빽빽이 끼어서 잤읍니다. 광산굴속에 비하면 광부사택이나 헛간 창고 등에 수용된 포로들은 재수가 좋은 편이지요. 이곳엔 우리와는 분리돼서 수용됐지만 수백명의 미군과 토이기 군포로도 보입데다. 본격적으로 개별심사를 시작하여 장교·헌병·정보요원·국방경비대출신 선임하사 등은 가려서 따로 수용합데다. 본적·주소·성명·나이·학력·소속·계급·입대동기(징용·지원병 여부 등)·군사교육정도 6·25에 대한 소감 등을 며칠을 두고 3∼4회씩 반복 심문해요.
먼저 말한 것과 조금만 달라도 심하게 추궁을 합데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장교이면서 사병이라는 등 신분과 학력 등을 속였어요. 특히 6·25에 대한 소감을 말할 때 「미군이 침략자」라는 점을 애써 강조해요. 『동무, 보아서 알겠지만, 전 국토가 미군비행기 때문에 모두 잿더미가 됐어. 그러면 누가 침략자이지?』하는 식으로 유도 심문을 해요. 그리고는 『우리가 「해방전사」들을 이런 광산에 수용하고 싶어서 수용하는 것이 아니오. 미군폭격으로 모든 시설이 부서졌으니 할 수 없지 않소. 미군에 전가하려는 거지요. 그자들은 국군포로들을 꼭 「해방전사」라고 불렀어요. 민족감정과 계급의식에 호소해서 세뇌하려고 무척 극성을 부리더군요.

<세뇌 위해 계급의식 고취>
『동무는 고향에서 농사지었지…. 돈과 권세와 「백」있는 자들은 모두 미국에 유학갑네 하고 도망가고 없는 자만이 전쟁에 끌려나왔어. 우리는 당신네들 「해방전사」에게 참다운 일할 기회를 주려는거요』라는 등. 교육수준이 낮은 포로 중에는 이런 교묘한 선전에 귀가 솔깃한 자들도 있었어요. 이래서 변절자와 배신자들도 생기구요.
이자들이 『누구는 장교인데 사병이라고 거짓말을 했다』고 더러 밀고도 했어요. 괴뢰는 이런 밀고자에게는 대가로 취사당번을 시킵데다. 취사당번은 굴속을 나가 돌아다닐 수 있고 괴뢰경비병들과 어울려 화롯불도 쬘 수 있어요. 특히 누룽지를 처분할 수 있는 특권이 있고요. 밀고 당한 사람들은 악질분자로 낙인찍혀 격리 수용됐어요.
입은 옷 그대로 외양간만도 못한데서 여러명이 기거를 하니까 며칠 못 가서 이가 득실거렸어요. 곧 이어 무서운 「발진티푸스」가 만연해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 병 이야기는 다른 송환자가 자세히 증언한다기에 생략하겠지만 괴뢰들은 이것도 선전에 이용했어요.
즉 괴뢰장교들은 포로 앞에 나와서 『치료를 못해 미안하다. 북에는 제약공장과 의료시설이 충분했는데 미군비행기 때문에 모두 파괴됐다. 「해방전사」들이 이렇게 고생하고 병들어 죽는 것은 미군비행기 때문이다』라고 해요. 그리고 하루에 1인당 30마리씩 이를 잡아내라고 공출을 시킵디다.
포로를 소대단위로 편성해 내무반생활은 자치에 맡겼어요. 소대장과 부소대장을 임명해 급식분배·수용소의 노역·벌목·인원차출·점검·규율단속 등을 자치에 맡겼어요. 고성방가나 싸움 등도 단속했어요. 괴뢰장교들이 매일 정치상학(정치선전 및 교육)을 하구요. 그자들은 우리를 「해방전사」니 뭐니 하면서 적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당장 이용은 못해도 우선 정신적으로 휘어잡으려 애를 쓰는 것 같았어요. 혹한이 계속되니까 자연히 동사자들도 생깁디다.

<소위 「해방전사」 사단 조직>
분산 후퇴할 때 땀이 나고 무거우니까 방한복을 벗어 던졌던 포로들이 꽤 많았어요. 이런 사람들이 많이 얼어죽었어요. 병들고 굶으며 빙판 속에서 포개어 자면서 화제는 먹는 것과 우리 운명에 관한 것뿐이었지요. 특히 먹는 생각이 제일 간절하더군요 .어느 날 우리 몇이 땔나무를 베러 산으로 올라가는데 외딴 오막살이 집에서 누가 문을 열고 손을 흔들어요. 보니까 나와함께 잡혔던 박승일 대령이에요. 경비병 1명이 서있고 온돌방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흔드는데 용기를 가지라고 격려하는 것 같아요. 들리는 말로는 박대령이 괴뢰수용소장에게 포로대우를 개선하라고 여러번 항의했다고 해요. 아뭏든 이후로는 박대령을 다시는 못 보았어요.
후일의 얘기지만 여순 반란군의 패잔주력이 지리산으로 들어갔을 때 박대령은 그들을 산청서 섬멸했기 때문에 포로교환 때 송환이 안됐다고 합디다.
1951년2월이 되니까 환자와 색출한 소위 「반동성 포로」들 3분의1은 그냥 두고 나머지 3분의2를 끌어내 우선 머리를 깎았어요. 그리고는 지금까지는 내무성소속 경비대의 관리를 받았는데 이제부터는 정치보위부로 넘어간데요.
분대·소대·중대 등 괴뢰군식 편제로 포로를 편성하고 소대장·분대장 등 모든 간부는 괴뢰군이 취임합디다. 집총과 전투훈련만 안하고 나머지 제식훈련은 모두 배웠어요. 그리고는 어디로 간다고 이야기도 없이 남으로 끌고 갑디다. 희천까지 내려가면서 쉬는 동안에 호상비판·자아비판·토론회·독보회 등을 시켜요. 순안의 옥평리에서 행군이 멈췄는데 다른 수용소에서 온 포로까지 합쳐 8천여명이 됩디다. 이때부터 기계라고는 전혀 없이 순전히 포로들의 손으로 비행장건설이 시작된 거예요. 포로들의 강제중노동이지요.

<쉬는 맛에 미기 폭격 기다려>
작업장 중심 30리의 민가에 숙박했고, 조밥에 무우 호박말랭이 썩은 고등어들을 줍디다. 이나마도 전에 비하면 진수성찬인 셈이지요.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이런 중노동을 했고, 1주에 두 번씩 야간작업도 했어요. 미군기가 오면 대피하느라고 쉬는데 이 맛에 모두가 하늘을 바라보며 비행기오기를 기다렸어요. 그런데 미군기는 포로작업장은 때리지 않고 주변의 중공군 고사포 진지만 골라 폭격합디다. 하루는 김일성이가 박헌영 최용건 박일우(내상)와 소련·중공군간부를 데리고 시찰하러 온 일도 있어요.
이렇게 중노동을 하는데 3천명 가량이 또 끌려옵디다. 알아보니 최근 강원도 현리 전투에서 잡힌 2군단 장병이예요. 이를테면 2군단에 새로 보충됐던 우리의 후배들이죠. 금강산서 심사 받고 오는 길이라는데 참 어처구니가 없더군요. 이곳에서 한달 남짓 중노동을 하고 내 소속대대만 평양의 사동수용소로 이동했어요. 여기서는 괴뢰최고사령부 후방총국간부로 있는 송호성 괴뢰소장과 강태무·표무원 등이 설치면서 포로관리를 합디다. 알다시피 송호성은 초대육군사령관을 지낸 국군장군인데 6·25때 저편으로 돈 자고 표·강은 남침 전에 강원도에서 자기대대 끌고 북으로 넘어간 반역자들이지요 처음엔 송호성을 장으로 국군포로 중에서 선택된 소위 「해방전사사단」을 만들어 일선으로 내보냈답니다. 그런데 「해방전사」들이 일단 총을 들고 전선으로 가자마자 괴뢰군분대장과 소대장 등을 쏘아 죽이고 집단으로 국군한테 손들고 가버렸대요.
그래서 이제는 「해방전사」는 절대로 믿을 수 없으니 무장은 시키지 말고 노동력 착취하기로 한거지요. 사동에서는 동이 보급되어 오래간만에 누더기를 갈아입었어요. 청색의 광목류인데 괴뢰들은 「폴란드」 「체코」 「헝가리」에서 보내온 거라고 떠들어댑디다. 나는 순안서부터 유창상·최광남·김학수·석진원 등과 함께 기회 보아 뛰자고 했는데, 석이 약속을 어기고 혼자 도망쳤어요. 4월20일에 학수만 보고 가자고 했더니, 멀지 않아 부대가 황주로 이동한다고 망설이기에 혼자 도망쳤습니다. 평양 사동수용소서부터 구사일생으로 적중을 횡단하여 임진강을 건너 우군전선에 도달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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