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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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비가 오락가락 하는 어느 날 나는 야트막한 산에 갈 기회가 있었다. 주위가 온통 파랗게 비에 씻긴 초목들로 기분이 환해져 발걸음도 가볍고 돌돌돌 흐르는 골짜기 물소리는 공해로 찌든 도심의 나그네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손이라도 담가 보고싶은 충동에 가까이 갔을 때 물살에 흐트러져 꽃이라도 핀양 하얗게 나불대는 밥알들이 보였다. 하나 둘이 아니고 밥 한 그릇을 몽땅 쏟아버린 양 물줄기를 따라 마냥 흐트러져 있는 게 아닌가?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산기슭에 자리한 조촐한 집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늘이 무섭지 않을까?)
나는 우리의 이웃에서도 가끔 하수구로 버려지는 하얀 밥을 보아 왔다. 어린애를 등에 업고 구걸을 오는 여인에게 동냥은커녕 한술 밥도 나누지 못하는 얄팍한 인정 속에서 너무도 큰 모순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다. 조금만 더 성의로써 지혜로운 살림을 하면 허실 되는 곡식은 없이 할 수도 있을 텐데….
식모도 없이 자신들이 하는 살림인데도 이런데, 하물며 그렇지 않은 경우 얼마나 낭비가 많을까.
문득 연간 8백만 섬이나 외미를 들여와야 한다는 심각한 문제가 생각났다.
생산량은 늘지 않는데 인구는 날로 팽창해가고 긴축을 해야 한다고 정부미도 앞으로는 배급제를 실사해야 한다며 안간힘인데 우리주부 모두가 합심해서 버려 나가는 밥만 없애도 얼마나 도움이 될까?
나는 부엌데기 10년에 아직 밥 찌꺼기를 버려본 일이 없다. 어릴 적부터 어머님의 가르치심이 그러했고 어쩐지 죄스런 일인 것만 같아 뵌다.
요즈음같이 야채가 흔한 계절에는 볶음밥이 일미이다. 우리 집은 찬값만 생기면 그 맛도 있고 영양 또한 빠지지 않는 볶음밥 요리로 온 가족이 한때를 즐기기도 한다.
오진영 (서울 영등포구 신림동 24의92 8통4반 이형우씨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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