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제14화 무역…8·15전후(10)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홍콩」무역>
「마카오」정청을 통해서 「홍콩」상품을 수출하는 것을 뒤늦게 알게된 「홍콩」정청은 1947년8월부터 대한수출허가서를 직접 발급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홍콩」상품이 나갈 바에야 허가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로써 「마카오」무역은 불과 5개월만에 막을 내리고 대신 「홍콩」무역이 등장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사람들은 얼마동안 이 방면의 거래를 계속 마카오 무역이라고 불렀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거꾸로 「마카오」무역까지를 통틀어 「홍콩」무역이라고 불렀다.
어느 정청이 허가한 것이냐는 차이일 뿐 실질내용은 다른게 없었기 때문에 혼동하기 쉬웠던 것이다.
어쨌든 47년8월 말께였던가 「아이비스」호라는 「홍콩」화물선 1척이 부산에 왔다.
당시 얘기로는 그 얼마 전에 이미 「홍콩」무역선 1척이 부산을 다녀갔다고 한 것 같은데 분명치 않다.
「아이비스」호가 싣고 온 상품은 대부분이 생고무·신문용지·옷감 그리고 보온병을 비롯한 각종 잡화로 종전의 마카오 무역선과 별 차이가 없었다. 동시에 이런 상품과 「바터」해서 가져간 것도 오징어와 해삼 말린 것·연·아연 광석 따위로 새로운 게 없었다.
「홍콩」무역은 이듬해인 1948년 봄부터 의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홍콩」무역 역시 처음에는 과거의 「장크」무역이나 「마카오」무역처럼 상대방무역선이 우리 나라로 오는 형태로 시작했으나 이 무렵에 와서는 우리나라무역선이 직접 「홍콩」으로 가는 말하자면 『자주무역』이 등장했다.
우리 무역선으로 맨 처음 「홍콩」에 간 것이 바로 화신무역의 앵도환이었다.
당시 화신은 박흥식씨가 2선에 물러앉고 박씨의 조카인 박병교씨(현 화신산업이사)를 화신무역 사장으로 해서 이창근 전무(납북) 손성겸 상무(변호사) 등의 진용을 갖추고 있었는데 『앉아서만 할게 아니라 한번 능동적으로 나가보자』는 의견이 나와 조선우선에서 9백t짜리 화물선인 이 앵도환을 「차터」했다.
이에 앞서 화신은 그해 2월 박병교 사장과 이규재 부사장(작고)을 「홍콩」에 파견, 앵도환입항준비를 하게했다. 이에 따라 4월 앵도환은 주로 해산물과 홍삼 따위를 싣고 당시 무역부장이던 김정중씨(현 상정상사사장)와 다른 직원 세 사람 인솔아래 태극기를 휘날리면서「홍콩」으로 갔다.
배가「빅토리아」만으로 입항할 때 「홍콩」정청은 태극기를 게양해서는 안된다는 등 약간의 말썽을 부렸으나 「마카오」정청과 그곳 사람들의 주선으로 무사히 해결되었다.
앵도환 입항소식은 당시 「홍콩」성도일보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화신 임직원들은 그 뒤 약 2개월간 체류하면서 갖고 간 물건을 처분하고 그 대신 수입물자룰 한배 가득 싣고 왔다. 교역물자의 내용은 「마카오」무역 때와 별로 달라진게 없지만 거래방식은 이시기에 와서 많이 달라졌다. 「트러스트·쉬프먼트」라고 하는 신탁선적제가 새로 생겨 유행된 것이다. 신탁선적제라는 것은 물건을 직접 싣고 가거나 또는 외상으로 보내서 그곳에서 처분한 뒤에 그곳 은행을 통해 송금 받든지 아니면 그 대전으로 물건을 사 갖고 오는 제도로서 48년4월부터 실시되었다.
군정청은 또 무역금융제를 신설, 상품에 따라서는 최대 50%까지의 무역금융을 지원해주기 시작했다.
한편 이 무렵 조선우선은 앞서 얘기했듯이 「홍콩」에 정기항로를 개설, 3천t급의 금천호를 취항시켰는데 초기에는 역시 외국선박과 경쟁이 안돼 나갈 때는 화물이 가득 차도 올 때는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한번은 순전히 뱃짐을 채울 목적으로 포장이 안된 비료3백t을 구입, 인천항에 들여왔으나 팔리지 않아 그냥 버렸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조선우선은 당시 「홍콩」에 있는 미국계회사인 「패트슨」사와 대리점계약을 맺고있었다.
이 시기에 천우사는 「홍콩」의 치생공사와 일종의 대리점계약을 체결, 주재원을 교환하고 주로 신문용지를 먼저 가져다가 처분하고는 대신 마른 오징어를 보내곤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 나라의 마른오징어는 대만을 비롯한 동남아 화교들간에 인기였는데 우리가 거래하던 곳이 「홍콩」뿐이었기 때문에 모두 일단 홍콩으로 가서 다시 남양각지에 재수출되었다.
정부수립을 위한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분야가 제도면에서나마 점점 틀이 잡혀가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시기에 와서는 무역회사수도 급격히 증가되었다. 내기억으로는 당시 무역협회회원 비회원을 합쳐 2백개가 넘었다.
지금처럼 수출실적을 기준으로 해마다 정비하는 것도 아니고 얼마간의 자본금과 임원을 갖추고 등록하기만 하면 장사를 할 수 있던 때였기 때문에 너나할 것 없이 간판을 건 것이다.
그때는 무역회사가 크고 작은 것을 수출실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수입실적에 따라 평가했다.
정부가 수출을 장려하기 위해 신경을 쓰지 않았던 때였기 때문에 『무역』하면 으례 수입을 가리키게 마련이었으며 수입실적이 많은 회사는 그만큼 유명했다.
회사는 많았지만 당시 수입량이 많기로 이름났던 회사들은 삼흥실업(서선하), 동아상사(이한원), 대한산업(설경동), 대한물산(김용성), 상호무역(안동원), 화신산업(박병교), 그리고 천우사 정도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특히 지금은 헐린 조선일보건물에 함께 세 들어 있던 삼흥실업은 당시 천우사와 1, 2위를 다퉜다. <계속> [제자는 필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