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범의 세상탐사] 무는 개는 놔두고 짖는 개만 쫓는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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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6호 31면

지난여름, 기자가 되고 싶어 하는 대학생들한테 글쓰기 강의를 했었다. 한창 이슈가 되던 ‘국정원 댓글’을 주제로 논술을 써보게 했다. 대부분 글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국내정치에 개입하는 국정원을 꾸짖고, 이번 사건을 계기로 진정한 정보기관으로 거듭나길 촉구하는 ‘범생글’이었다.

그런데 눈에 띄는 게 하나 있었다. “실패한 스파이는 화려하지만 성공한 스파이는 따분하다”는 ‘업계’의 격언으로 시작한 글이었다. 한마디로 뭘 하려면 제대로 하라는 거였다. “정보기관으로선 세간의 입에 오르내린다는 것 자체가 치욕이다. 임무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렇다. (…) 그 정체성을 지켜내지 못했다면 그것은 무능이다.”

바닥에 떨어진 건 국정원의 도덕성만이 아니라는 거였다. “일반인에게 미행당해 은신처를 들키는 요원한테 우리의 안보를 맡길 순 없는 노릇”이라면서 “(무능해서) 화려한 역사의 중심에 서지 말고, (능력 있어) 따분한 국가기관이 되길 바란다”고 이 학생은 글을 마쳤다.

학생의 말마따나 정보기관의 무능은 비도덕성보다 훨씬 치명적일 수 있다. 국정원 요원이 ‘찌질한’ 댓글이나 달고 있는 건 그의 봉급으로 축나는 예산이 좀 아까울 뿐이지만, 그것조차 제대로 못 해 치러야 하는 사회적 갈등 비용은 실로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물론 정보기관이라고 늘 성공만 할 수야 있겠나. 세계 최고의 정보기관이라는 이스라엘 모사드조차 실수를 해서 국제적 망신을 당하곤 하는 게 현실이다. 폐쇄회로TV(CCTV)에 요원의 얼굴이 찍히거나 위조여권 사용이 들통나는 지극히 초보적인 실수도 드물지 않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국민이 모사드의 명예를 의심하지 않는 건 그들에게 분명한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짖는 개는 내버려두지만, 무는 개는 반드시 없앤다”는 게 그것이다. 입으로만 떠드는 정치집단에는 관심이 없지만, 테러단체처럼 국가안보를 직접 위협하는 적들은 비도덕적 수단을 써서라도 기필코 무력화한다는 것이다. 모사드가 국내정치에 개입할 여지가 없는 이유다.

우리네 정보기관 국정원이 덜 명예롭게 여겨지는 건 그런 원칙이 없는 까닭이다. 대학생까지 걱정하는 무능력도 사실상 거기서 비롯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그 입맛에 맞게 정보기관의 수장이 바뀌고 임무가 달라지는데 ‘눈치보기’ 능력 말고 나아질 게 무에 있겠나 말이다.

하긴 정보기관이 해바라기하는 정권이 유능하지 못하니 능력 향상은 애초부터 무리인지도 모르겠다. 단순한 ‘찌질이’ 문제를 정보기관의 선거 개입도 모자라 검찰 내부분란으로 키우더니, 급기야 법무부·안행부·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의 개입으로까지 줄줄이 확대재생산하고 있는 것은 무능의 극치라 아니할 수 없겠다.

정보요원의 댓글이 선거 결과를 뒤바꿀 만큼 영향력이 있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자신이 지시한 일이 아닌 만큼 현 대통령이 국정원에 빚진 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주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찌질한’ 짓거리라도 정보기관이 선거 관련 댓글을 달고, 이를 재전송한 것은 엄연한 잘못이다. 게다가 그런 잘못이 밖으로 드러나 문제가 됐다면 의당 누군가는 책임을 지고 국민에 사과를 했어야 할 일이다.

이전 정부 때 벌어진 일이라고 해서 전직 대통령이 사과해야 한다는 주장은 가소롭다. 경복궁이 무너졌다고 대원군한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논리와 다름없다. 정부기관의 잘못이 드러나면 그 궁극적 책임 소재는 정부의 현직 최고책임자를 향하는 게 마땅한 이치다. 박근혜 대통령으로서는 오히려 기회가 아닌가 싶다. 국정원 개혁이 공약사항이었던 까닭이다. 내 잘못도 아니고 빚진 것도 없는데 문제를 일으켰으니 원칙을 중시하는 대통령으로서 거리낌 없는 개혁을 서두를 수 있지 않겠나. 지금처럼 소 닭 보듯 할 일이 아니란 얘기다.

역설적으로 국정원 개혁은 지금까지 너무 자주 추진돼온 측면이 없지 않다. 정권교체 때마다, 재임기간이 평균 1년6개월도 못 되는 국정원장이 바뀔 때마다 개혁이라는 구호를 앞세웠다. 그래서 누더기가 되기도 했고 개악된 사례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대원칙은 한 번도 손도 못 댔다. 국내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전제와 이를 뚝심 있게 밀고 갈 원장의 임기 보장이 그것이다. 이게 빠지면 어떠한 미사여구로 포장된 개혁도 공염불인데 말이다.

위기 돌파는 기본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참에 원칙을 중시하는 대통령이 그런 대원칙에 손을 댈 수 있기를 기대한다. 국정원이 무는 개한테는 속수무책이면서 짖는 개만 쫓아다니는 무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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