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피치] 야구성적은 키 순서가 아닙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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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돌'이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진 왼손투수 차명주(30.두산)에게는 가슴 아픈 기억 하나가 있다. 1989년 부산 대신중 졸업을 앞두고 차명주는 부산시내 세칭 '명문'이라 불리는 K고.P고에 진학을 원했지만 모두 "다른 곳을 알아봐라"는 대답을 들었다.

남보다 뒤질 것 없는 성적은 물론 왼손투수로서의 희소성까지 갖춘 그였기에 원했던 학교에 입학할 수 없다는 것이 가슴 쓰라린 좌절이었다.

차명주에 따르면 두 학교는 "키가 작아 장래성이 없다"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는 키가 큰 편이 아니다. 1m75㎝가 채 안된다. 중학교 시절에는 지금보다 더 눈에 띄게 작았다고 한다. 그는 결국 경남상고를 찾아가 입학을 허락받고 운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3년 뒤 차명주를 앞세운 경남상고는 고교야구의 개막과 함께 대통령배와 청룡기를 휩쓸며 전국을 호령했다. 그의 입학을 거절했던 두 학교는 결승 문턱도 넘지 못했다.

그는 청소년대표에 선발됐고 대학에 진학해서는 국가대표로서 탄탄대로를 달렸다. 96년 프로야구 최초로 계약금 5억원 벽을 깨며 프로에 뛰어들었고, 입단 7년 만인 지난해에는 억대연봉자 대열에 합류했다. 최근 2년 연속 프로야구 홀드부문 1위. 손꼽히는 왼손 구원투수로서 자리를 확실히 잡았다.

키 작은 차명주의 성공기를 '국내에서나 통하는, 그것도 아주 보기 드문 스토리'로 여겨서는 곤란하다. 지금부터 거론하는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면면을 보자. 그레그 매덕스(애틀랜타 브레이브스).페드로 마르티네스(보스턴 레드삭스).톰 글래빈(뉴욕 메츠). 이 세명은 훗날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것이 확실한 대투수들이다.

매덕스와 글래빈은 1m80㎝를 겨우 넘고, 마르티네스는 그에 조금 모자란다. 메이저리그 투수로서는 작은 편이다. 최근 몇년 사이 알아주는 에이스급으로 떠오른 팀 허드슨(오클랜드 애슬레틱스.지난해 15승).로이 오스왈트(휴스턴 애스트로스.19승)의 경우도 비슷하다.

지난해 부진했지만 연봉으로만 따지면 역대 메이저리그 투수 가운데 최고 갑부가 된 마이크 햄튼(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키는 1m76㎝밖에 안된다. 마무리투수로 1백60㎞의 광속구를 던지는 빌리 와그너(휴스턴 애스트로스)도 1m80㎝가 안되고,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김병현(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도 그렇다. 김병현은 5피트 11인치(약 1m79㎝)로 통하지만 실제 키는 1m75㎝ 정도다.

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올해 기대를 모으는 왼손투수 케이시 포섬(보스턴 레드삭스)은 75㎏이 채 안되는 갸날픈 몸을 지녔다.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등록된 투수 가운데 가장 가볍다. 그러나 그는 손꼽히는 빠른 공을 던진다.

자신에게 주어진 몸을 개발하고 이를 십분 활용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춘다면 키나 몸무게는 그저 '숫자'에 지나지 않게 된다. "키가 작아서 안된다"를 주장하는 스카우트가 있다면 그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다. 신체조건이 좋으면 유리할 뿐 나쁘다고 해서 '제한 조건'은 아니다.

이태일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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