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5)슬기로운 「주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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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두 달 동안 전국을 휩쓸고 극성을 부리던 열풍은 지나갔다.
현명한 정치인간에는 승자와 패자가 악수하는 일이 많아진 모양이니 듣기에도 흐뭇한 일이다. 여러번 선거를 치렀지만 이번만큼 뒷맛이 개운한 선거는 없었다.
그것은 단순히 어느 당이 더 많은 자리를 차지했다던가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높은 차원에서 우리국민의 정치의식이 정치인을 뺨치게 높아졌다는 것과, 우리가 얼마나 지혜로운 국민이었는가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유세장에 몰려들지 않는다고 무관심하다고 염려했지만, 그들은 이미 마음에 정한바 있었고 그런데 가서 쭈그리고 앉았을 만큼 한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역감정이 어쩌니 하고 꼭 나라가 두동강이가 날듯이 야단했지만, 그런 지저분한 감정으로 놀아나는 국민이 아님을 여실히 증명해 주었다.
정당 바꿈질을 떡먹듯이 하는 무리들에게는 철퇴를 가했다. 권위의식으로 코가 높아져서 거드름을 피우는 사람은 물러가게 했다. 이번 선거는 여당에는 안정세력을, 야당에는 견제세력을 함께 마련해 주었다.
얼마나 슬기로운 투표인가! 만약 백성을 깔보는 정치인이 있었다면 이번 선거로 등골이 오싹해졌을 것이다. 이제 열풍은 지나갔다. 우리는 모두 민주국민의 긍지를 품고 각기 맡은 일로 돌아가야 하겠다.
이제 앞으로 4년 동안 감시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겠지만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그만큼 준엄한 경고를 했으니 여야가 좀더 겸허한 마음으로 행동하지 않겠는가. 이제 담벼락에 나붙은 수많은 얼굴들을 지워버리고, 학생은 책을 들고 교실로, 농부는 괭이를 들고 논밭으로, 공무원은 책장머리로, 노동자는 일터로, 또 한번 우리의 민주역량과 슬기로움을 과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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