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진상규명 어렵게한 허술한 초동수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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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유족과 국민들의 의혹을 풀기 위해 사건을 원점에서 재수사하겠습니다." 강대형 대구지하철 화재사건 수사본부장은 2일 오전 브리핑에서 사건 전반을 철저하게 다시 조사해 모든 의문을 풀겠다고 강조했다.

정부와 대검찰청이 사건에 관여하면서 나온 첫 입장 표명이다. 거꾸로 보면 수사가 미진했다는 점을 인정한 것으로 해석된다.

사건 발생 열흘이 넘도록 경찰이 전말을 명쾌하게 밝혀내지 못하면서 유족들의 불만도 터져나오고 있다. 유가족 대책위원회의 윤석기(39)위원장은 "현장을 훼손하고 수색을 부실하게한 경찰을 믿을 수 없다"며 강한 불신감을 나타냈다.

수사본부에 대한 불신은 허술한 초동 수사에서 비롯됐다. 사건 직후 기관사의 신병과 마그네틱 테이프를 확보하지 않은 것이 결정적 실수로 꼽힌다. 기관사는 사고 후 하루종일 회사 관계자를 만났고 경위서도 여러차례 작성했다.

그래서 이미 말을 맞춘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종합사령실과 기관사의 통화 내역이 담긴 마그네틱 테이프는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중요한 자료다. 그러나 경찰은 지하철공사 측이 작성한 허위 녹취록을 근거로 수사하다 벽에 부닥치자 5일째인 22일에야 테이프를 판독해 사건의 윤곽을 파악했다.

이를 토대로 다시 추궁하자 1080호 기관사는 "무의식 중에 스스로 전원 키를 뺐다"던 진술을 "사령실의 지시를 받았는지 긴가민가하다"고 바꿨다. 전원 키를 빼면 출입문이 모두 닫혀 승객이 탈출할 수 없게된다. 희생자가 늘어난 중요한 이유다.

경찰 관계자는 당시"관련자들이 혐의사실을 계속 부인하다 증거를 들이대면 실토하는 등 거짓말을 계속해 수사가 어렵다"고 했다.

당사자의 진술에만 의존하다 보니 수사가 지지부진할 수 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발화지점도 파악하지 못하고 오락가락하고 있다. 허술한 초동수사에다 사고 현장 훼손사건까지 발생하는 등 어이없는 일이 이어졌다. 경찰이 강조하는 '과학 수사'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다. 엄청난 희생자를 낸 사건의 전말과 책임자를 가려낼 수 있을지 유족과 국민들은 지켜보고 있다.

홍권삼 전국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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