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워치] 부시의 종교 편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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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6일 미국기업연구소(AEI)에서 이라크 전쟁과 관련해 자신의 '중동 비전'을 밝혔다.

AEI는 미국의 대표적 우파 싱크 탱크로 친(親)이스라엘, 신보수주의 세력의 아성(牙城)이다. 부시 행정부 고위직에 소속 학자 20명을 진출시킴으로써 미국의 대외정책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AEI 연설에서 부시는 사담 후세인 정권 타도가 이라크를 민주화할 뿐만 아니라 "해방된 이라크가 자유의 힘을 보여줌으로써 중동 전체에 희망과 진보를 가져올 것"이라는 '중동 민주화 도미노 이론'을 제시했다.

특히 후세인 제거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 이유는 그동안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을 지원해온 후견인 후세인이 사라짐으로써 테러가 더 이상 발붙일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부시의 구상은 종교적 신념의 산물이다. 한때 알코올 중독에 빠질 정도로 방탕한 생활을 했던 부시는 '거듭난 기독교도'다. 제일 좋아하는 철학자가 누구냐는 질문에 '예수'라고 답할 정도다. 비단 개인 생활뿐 아니라 정치도 종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부시는 기독교 중에서도 근본주의 성격이 강한 복음주의 교파(敎派)에 속한다. 부시가 대통령에 당선된 데는 남부의 우파 기독교연합과 유대인 세력이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부시의 종교적 편향은 외교정책에서 선과 악, 우리 편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 초강국 미국의 우월주의를 바탕으로 한 독불장군식 일방주의가 합해졌다.

최근 이라크 전쟁을 둘러싸고 미국과 유럽이 대립하는 것도 근본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비에르 솔라나 유럽연합(EU) 외교대표는 이를 가리켜 미국의 종교적 세계관과 유럽의 현실적.세속적 세계관의 대립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국제 문제를 다루는 데 종교가 개입하는 것은 위험하다. 미국 칼럼니스트 윌리엄 파프는 국제 관계에서 '기독교 절대주의'를 포기하라고 설파한 미국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의 경우를 좋은 예로 든다.

니버는 국제 관계에서 현실 권력과 윤리가 서로 충돌할 경우 윤리적 기준이 아니라 현실 권력의 필요에 따르라고 충고했다.

니버의 이 같은 입장 정리로 미국 외교정책에서 현실주의 지적 전통이 확립됐다. 현대 미국 외교의 거물이었던 조지 케넌은 "니버는 우리 모두의 아버지"라고 찬양했다.

전쟁은 결국 평화를 가져온다. 하지만 막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미국이 계획한 '충격과 공포'작전은 이라크 전쟁이 시작된 후 48시간 동안 8백발의 크루즈 미사일을 비오듯 발사함으로써 이라크의 전의(戰意)를 꺾는 것으로 돼 있다.

따라서 병사는 물론 민간인 희생자도 엄청날 것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전쟁의 직접적 결과로 인한 사상자가 50만명에 이르고, 1백만명 가까운 난민이 발생하는 '인도적 대재앙'을 예상한다.

이라크 국민들은 이 같은 희생을 치르고도 미국을 독재로부터의 해방자,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받아들일까. 그들은 미국이 가져다준 자유를 신제국주의 식민지배의 도구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미국식 민주주의로 중동 전체에 평화가 찾아올까. 부시의 중동 비전은 참담한 실패였던 십자군전쟁의 재판(再版)이 되지 않을까. 전쟁의 북소리는 점점 커지고 결단의 시간은 다가오지만 의문들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정우량 국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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