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조선 최고 스타 박춘재를 아시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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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1910년대에 요즘 가왕(歌王) 조용필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던 인물이 있었다. ‘국악 천재’라 불렸던 박춘재(1881~1948·사진) 명창이다. 소리면 소리, 재담이면 재담, 무대공연의 모든 것에 능했던 팔방미인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예능 스타로 이름난 그는 궁궐 내 음악 행사 총감독인 가무별감(歌舞別監) 직을 받아 어려운 시절 임금과 왕실 사람들을 위로하는 소임을 다했다.

 한동안 잊혀졌던 박춘재 명창의 공덕을 기리는 동상이 건립된다. 서울시 종로구 창덕공원 부지에 높이 2m, 지름 3.5m 규모의 동상이 서고 그 앞쪽 도로를 ‘박춘재 거리’로 이름 짓기로 했다.

 조선 말과 민족 항일기에 경기·서도 소리의 명인으로 우리 근대 예술사를 지켜온 위업을 돌아보는 자리다. 명창의 장손이자 화가인 박진홍(70)씨가 대표로 있는 ‘박춘재 명창 재담 기념사업회’가 앞장섰다. 원로 국악인인 이은관·김뻑국씨 등이 후원하고 있다.

 박진홍씨는 “한국에서 처음 음반을 취입한 할아버지의 위업을 기려 동상 기단을 레코드판 모양으로 디자인했다”고 설명했다. 영친왕이 돌배기일 때 아무도 못 말리게 울다가도 박춘재 명창이 달래면 빙긋 웃었다는 일화를 소개한 박 대표는 “그 인연으로 레코드 취입하러 일본에 건너간 할아버지가 볼모로 가있던 영친왕을 20년 만에 재회하며 함께 울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고 했다.

 박춘재 명창의 일대기를 복원한 작가 김은신씨는 『조선일류가객 박춘재』(도서출판 유성)에 고인을 “분단시대를 극복한 유일한 소리의 세계 경서도창의 선구자”로 평가하고 있다. 이북의 서도소리를 이남에 전수한 박춘재 명창으로 인해 서도창에 있어서만은 분단과 좌절이 아니라 화합과 통일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한국 최초의 연예스타요, 무대공연의 개척자인 박 명창 동상 제막식은 내년 4월 열릴 예정이다. 02-2108-7507.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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