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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세계의 한국인|페스탈로치 촌 아리랑 하우스|페스탈로치 촌(스위스)=홍사덕 특파원(3)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눈 끝까지가 온통 눈 세계였다. 스위스의 트로겐 시에 도착하던 날 밤10시쯤부터 날리지 시작한 눈발이 밤새도록 퍼부은 것이다. 눈길을 따라 시 중심부에서 1㎞쯤 떨어진 페스탈로치 촌에 도착한 것은 아침9시30분.
아리랑이란 현판을 보고 현관을 들어서자 몇 폭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색동옷을 입고 널뛰는 소녀들, 초가집이 있는 풍경화 등 모두 눈에 익은 그림들이었다. 스위스에서도 풍치가 아름답다는 이곳에 살면서도 고아들은 역시 초가집 있는 풍경이 그리웠던가 보다.

<6년 전에 1차 입촌>
원아들은 마침 수업 중이었다. 1년 남짓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는 보조교사 노인숙양(23)의 안내로 식당 겸 응접실에 들어서자 역시 원아들의 짙은 향수가 물씬 풍겨왔다. 족두리 쓴 새색시의 조각, 호미질 하는 농부의 그림 등 방안은 한국의 풍물로 가득 장식돼 있었다.
『제 1차로 온 아이들이 벌써 6년이나 된 셈입니다. 한데 향수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은 갓 온 아이들일수록 심해요. 69년에 마지막으로 온 5명은 요즈음에야 겨우 안정된 것 같습니다.』
노의 이야기를 듣고있노라니 왁자지껄하는 소리와 함께 오전수업을 마친 원아들이 하우스·엘테른인 이학표씨(36) 유귀애씨(35)부부와 함께 들이닥쳤다.

<예능서 두각 나타내>
12살부터 18살까지의 원아들은 예상 이상으로 밝은 표정이었다. 행동뿐만 아니라 표정마저 스스럼없는 서구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9명의 소녀가 한결같이 악수로 인사를 대신한 것이다.
45년 1월에 세워진 이 마을에 한국고아들이 입촌한 것은 65년 봄. 당시 스위스의 대사였던 이한빈씨와 지금도 마을 회장으로 있는 빌 박사의 주선이었다. 빌 박사는 61초에 약 6개월간 한국휴전감시위원단에서 근무한 일이 있어 이대사의 제안에 적극 협력했다. 70년 인도가 이 마을에 추가되어 지금은 12개국에서 온 3백여명의 고아들이 하나의 국제 촌을 이루고 있다.
각국별 하우스에는 부부교사가 있어 부모의 역할까지 하고 있다. 지난해 8월 이곳에 부임한 이학표씨는 진명여고에서 10여년 동안 국어교사로 근무했다고 했다.
이곳 아리랑 하우스에는 원래 24명이었으나 중학과정을 마친 5명이 『젊은이의 집』으로 나가 공동생활을 하고 있어 현재 16명의 원아가 모여 살고 있다. 학제는 국민학교 6년 과정과 중학과정 3년이 계속되는 스위스식으로 그중 6학년까지는 각국 하우스에서 엘테른이 지도하며 중학과정만 별도의 학교에서 공부하고있다.
이학표씨의 말로는 다른 나라 아이들에 비해 나이가 많은 탓인지 우수하다는 평을 많이 받고있다고 했다. 특히 예능방면에 두각을 나타내 보통 2∼3개의 악기를 다룰 수 있으며 16명 전원이 마을 오키스트러의 멤버로 활약한다는 이야기였다.
이중 차동준군(14)은 트로젠 시 오키스트러의 트럼펫주자로 발탁되어 맹활약하고 있다. 차군은 매일 새벽 마을뒷산에서 연습을 하는데 첫 곡은 꼭 애국가로 시작하기 때문에 페스탈로치 촌에서 애국가의 멜러디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 했다.
한국의 고아들은 또 창의력이나 단결력에 있어서도 단연 앞서고 있었다. 빌 회장이 한때 『국제 촌의 설립정신에 어긋난다』는 주의를 들을 정도로 똘똘 뭉쳐있다는 것.
고아들의 창의력을 테스트한다는 모르겐·페어는 아리랑 하우스가 들어선 뒤『한국 고아들을 위한 잔치』가 돼버렸다. 매주 월요일마다 각국 하우스가 돌아가면서 벌이게 돼있지만 한국차례가 아니면 구경꾼이 모이지 않기 때문.
이들이 공부하고 있는 국어교과서도 국내에서는 이미 쓰이지도 않는 65년 판이나마 65년 제1차 파견 때 보낸 8권뿐 이어서 지금까지 두고두고 쓰며 두 사람씩 한 권을 같이 보고 있다. 국어책 뿐 아니라 다른 교과서도 마찬가지였다.

<교과서 지원 아쉬워>
『고추장이나 김치도 먹고싶지만 그보다도 새책을 좀 보내주셨으면 좋겠어요. 한글이 쓰인 책은 저게 전부입니다.』
박흥원군(19)이 가리키는 책꽂이에는 표지가 너덜너덜한 몇 권의 아동문학전집이 꽂혀있었다. 책꽂이 바로 위에는『아리랑 하우스의 양식』이라고 쓴 목각이 곱게 걸려있었다.
『다른 나라의 경우는 본국정부의 보조 외에도 민간단체로부터도 상당한 후원이 있습니다. 다른 것은 말고라도 우선 교과서만이라도 제대로 갖출 수만 있다면….』
말끝을 흐리는 이학표씨의 목소리에 1년 전에 한번 먹었다는 「라면」맛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있던 소년들이 갑자기 조용해 졌다. 교과서가 틀린다는 말은 처음 듣는 듯 했다. 그 침묵 속에는 무어라 표현할 길 없는 서글픈 빛이 서려있었다.
고국에서는 이미 팽개쳐버린 낡은 책을 그토록 정성스레 스카치·테이프로 붙여가며 돌려본 것이 분해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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