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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패자 나뉘는 일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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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욕구불만-절망-과로사-의기소침-실업자-막다른 골목' '불황-자살-불안정-테러-혼란'.

영국의 권위지 파이낸셜 타임스(FT) 19일자 매거진이 '일본 사회의 지하철 노선도'를 그렸다. 노선상의 역(驛) 이름이 한결같이 어둡고 불안하다. 오늘의 일본이 그렇다는 얘기다. 매거진은 1995년 3월 20일 일어났던 사린가스 사건 10주년을 맞아 일본의 현주소를 진단했다.

▶ 파이낸셜 타임스 매거진 19일자의 표지. 일본이란 사회의 현 상황을 지하철 노선도처럼 그렸다. 중간 윗부분에 '불황'이란 큰 역이 있고 그 바로 남쪽 역은 '자살'이며 '공포' '실업자'역을 지나면 '막다른 골목'이란 종착역에 이른다. 다른 노선 역시 '욕구불만' '과로사' '의기소침' '혼란' '수치' 등 하나같이 일본의 위기를 보여주는 제목들이다.

'상실의 시대'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는 인터뷰에서 "95년은 일본 현대사의 분수령이 되는 해"라고 분석했다. 이 해에 발생한 사린가스 사건과 고베(神戶) 대지진 때문이다. 일본이 안전한 사회이며, 끊임없이 성장.발전하는 이상사회라는 일본인들의 확신을 뒤집었다는 것이다. 무라카미는 "옴진리교도들도 비정상적이지만 매일 두 시간씩 걸려 출퇴근해 개미처럼 일하고 집에 돌아와선 파김치가 되는 일본 샐러리맨들의 삶도 비인간적이다. 이는 인간성의 마멸"이라고 주장했다.

옴진리교가 일본의 왜곡된 사회상을 반영한다는 진단이다. 교주 아사하라 쇼코(麻原彰晃)는 완전무결한 천황에 해당되며, 교내에서 시험을 거쳐 승진해 가는 과정은 일본의 입시.승진 방식과 유사하다. 교도 가운데 명문대학을 나온 엘리트가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패러사이트 싱글스(parasite singles.부모에게 얹혀 사는 독신남녀.캥거루족)'란 말을 만들어낸 일본 도쿄가쿠게이(東京學藝)대 야마다 마사히로(山田昌弘) 교수는 "전후 일본은 기업이 종교집단이나 마찬가지였다"고 분석했다.

옴진리교의 문제점을 일찍부터 지적해 아사하라에게 직접 협박을 당하기도 했던 다로 마키(전 마이니치신문 에디터)는 "비슷한 생각과 생활을 공유해온 일본인들이 최근 승자와 패자로 나뉘고 있다. 패자들은 더 심한 좌절과 고독을 느낀다. 사린가스 사건 같은 일이 다시 생긴다고 해도 놀랄 것 없다. 일본은 지금 매우 위험한 사회이니까"라고 말했다.

런던=오병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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