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곯던 시절 음식, 돈 버는 효자 됐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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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6일 보릿고개마을 농촌체험 프로그램에 참가한 어린이들이 고구마를 캔 뒤 즐거워하고 있다. 주민들은 과거 보릿고개 시절의 경험에서 마을 발전 아이디어를 착안했다. 보리개떡 등 추억의 음식과 체험 프로그램으로 도시인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안성식 기자]

맑은 계곡이 있다고 하지만 굳이 ‘풍경을 감상하러’까지 관광객들이 찾아오지는 않을 것 같은 산기슭 마을. 주민 평균 연령 75세. 이런 마을에 지난해 관광객 1만4300명이 찾아와 3억1400만원을 쓰고 갔다.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연수1리 보릿고개마을. 주민 대부분이 보릿고개의 기억을 가진 동네다. 산기슭에 위치해 농지가 좁아 보릿고개의 배고픔이 남달랐다고 했다. 여느 가난한 마을처럼 보릿겨를 넣은 보리개떡을 먹고, 그것마저 떨어지면 나무껍질을 벗겨 씹으며 배고픔을 이겨야 했다.

 그런 이 마을에 정작 ‘보릿고개’란 이름이 붙은 것은 주민들 뇌리에서도 춘궁기의 기억이 아스라이 사라져 가던 2004년. 한 달 내내 패스트푸드만 먹고 살면서 신체 변화를 기록한 미국 영화 ‘슈퍼 사이즈 미(Super Size Me)’가 화제가 됐던 해였다. 영화로 인해 ‘슬로푸드(slow food)’가 관심을 얻자 경기도가 나섰다. 전통음식 대부분이 슬로푸드라는 점에 착안해 각종 전통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어 보는 ‘슬로푸드 체험마을’을 육성한다는 것이었다.

추억·슬로푸드 … 도시민 줄 이어

 소식을 들은 6대 토박이 김지용(64) 초대 마을위원장이 주민들을 설득했다. “체험마을을 만들어 외지인들 북적거리게 하고 소득도 높여 봅시다.” 슬로푸드에 추억을 담는다는 ‘보릿고개마을’이란 아이디어도 김 전 위원장의 머리에서 나왔다.

 신청을 하자 경기도는 처음 “그보다 산골이고 하니 산채마을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런 마을은 많을 것 같아서…. 그냥 우린 보릿고개마을 하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내는 보릿가루에 쑥·단호박을 넣어 만든 ‘개량 보리개떡’이 잘 팔릴 것 같아 이름을 고집했다고 한다. ‘보리개떡’을 대표 상품으로 내놓으면서 ‘산채마을’이라고 해서야 어울리지 않을 터였다.

 8600만원의 지원을 받아 사업을 시작했다. 보리개떡과 순두부·인절미 같은 것을 내세웠다. 하지만 알려지지 않아 찾아오는 이가 별로 없었다. 가끔씩 찾아오는 어린이들의 웃음소리가 귀에 꽂혀서일까.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2008년엔 농림수산식품부와 경기도·양평군으로부터 3억5900만원을 추가 지원받아 돌담길을 조성하고 슬로푸드 체험관을 만들었다.

체험 프로그램 또한 늘렸다. 용문산에서 내려오는 연수천에 맨손 송어잡이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화전·밀전병 만들기, 버들피리 만들어 불기, 트랙터 타기 같은 것도 자꾸자꾸 생겨났다.

송어잡기 등 체험 다양화도 한몫

 “잊혀졌지만 건강에 좋은 먹거리와 재미있는 놀거리가 있다”는 입소문이 나 면서 찾아오는 이들이 쑥쑥 늘었다. 목요일인 지난달 26일에는 서울 성일초등학교 학생 15명이 와서 놀다 갔다. 인솔했던 표효정(40) 교사는 “시골 고향에 대한 추억이 없는 아이들이지만 신기한 체험과 먹거리 자체를 즐거워한다”고 말했다.

 보릿고개마을은 이젠 대표적 체험마을 성공사례로 알려져 올 들어서만도 경기도 이천시, 강원도 정선군, 전남 곡성군에서 벤치마킹을 하고 갔다. 주변에 펜션이 들어서 땅값도 뛰었다.

양평=전익진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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