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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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살림하다』라는 우리나라 말은 서구 어느 나라 말에서도 그 완전한 동의어를 찾아보기 드문, 이를테면 한국특유의 의미를 가진 말인 듯 하다. 물론 영어로는 Keep house, 불어로는 Tenir la maison등의 흡사한 표현이 있기는 하나 그 의미의 깊이와 넓이가 아무래도 다르고 특히 그「뉘앙스」의 진폭이 아주 다르다. 이것은 아마도 서로의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에서 오는 차이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서민사회에 있어서 「살림」하면 대체로 「고생」을 연상하게된다. 그래서 『살림하자니 고생』이라는 일종의 만성적 비탄을 흔히 듣게되고 스스로 그런 소리를 하기마련인 모양이다. 그래, 「살림」은 진정 고생스러울 것인가. 우선 초보적인 살림은 유일한 남과 유일한 여와의 결합으로부터 시작한다. 일주야 24시간을 공복으로 앉아서 서로 얼굴만 마주쳐다봐도 마냥 행복할 것만 같은 신혼생활이 그 서주곡이다.
그후 세월이 가면서 귀여운 아기가 하나 둘 태어나고 가족관계가 이루어지며 한 가정이 버젓하게 구성된다. 그런데 어째서 「살림」이 고생스럽단 말인가. 특히 주부에게 있어서.
「살림」의 주요역군은 단연 주부일 것이다. 남편은 파수병에 불과한 존재다. 그것도 지극히 우둔하고 멍청한… 그는 단단히 무장을 하고 대문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적의 침입을 막기는 하지만 반대로 대문 안의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깜깜 이다.
또는 간혹 그것을 의식적으로 묵살하기도하고 때로는 한계성을 빙자하여 교묘히 책임을 회피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살림」의 모든 책임이 자연 주부에게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모든 「살림」의 의미를 나는 최근 가벼운 체험을 통해서 깨닫게 됐다. 며칠 전 갑작스런 일로 아내가 친정엘 갔다. 아무리 신접살림이긴 하지만 그래도 명색 주부가 없고 보니 주인공 없는 무대와 같다. 식모는 말할 것도 없고 부대가족하나 없는 외톨이지만, 그래도 아침밥만은 손수 지어먹어야 했고, 밖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몇 번씩이나 시계를 보며 구공탄 갈아넣을 것을 염려해야 했고, 퀴퀴한 걸레를 빨아 방을 닦아야 했고, 끙끙대며 이부자리를 펴고 개야만 했으니, 기타 자질구레한 일일랑 아예 말할 것도 없다. 물론 이 생활은 단 이틀동안 계속되었지만, 그 신역의 고생스러움과 조마조마한 마음 쓰임은 전혀 새로운 경험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 본다.
월급봉투만 내밀면 가장의 책임이 완수되는 책임이 완수되는 그런 유유자적한 현실은 지금 아니지 않은가. 적어도 우리의 가정생활이 선진외국같이 간편해질 때까지는 「내조」아닌 「외조」가 필요할 것만 같다. 【송재영 <충남대교수·불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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