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 길을 묻고 천주교에 의지한 최인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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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서울성모병원 최인호 작가의 빈소에는 천주교 정진석 추기경이 보낸 화환과 불교 조계종 진제(眞際) 종정의 화환이 고인의 영정 옆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도회적 모더니즘에서 출발해, 사실을 중시하는 역사소설을 거쳐 영원한 평화를 추구하는 종교의 세계에 이른 고인의 문학세계를 상징하는 것 같다. 가톨릭 신자(세례명 베드로)였던 고인은 불교소설 『길 없는 길』(1993)과 『할』(2013)을 내기도 했다. 1998년 불교출판문화상과 가톨릭문학상을 수상했다

 고인과 두 종교 지도자의 만남은 극히 짧았다. 하지만 고인의 죽음을 두고 누구보다 안타까워할 만큼 강렬했다. 특히 진제 종정과는 암 발병 이후 한 차례 만났을 뿐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처음 만난 자리에서 형님과 아우의 연을 맺자고 종정이 먼저 제안했다고 한다. 2008년 침샘암 투병생활에 들어간 고인은 2009년께 진제 스님에게 먼저 만나자고 요청했다고 한다. 종정이 주석하고 있는 부산 해운정사에서 만나 두 시간여 대화를 나누며 수수께끼 같은 불교 공안(公案·화두)의 의미 등 큰스님에게 물을 수 있는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고인은 특히 진제 종정의 일대기를 소설로 쓰고 싶어 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사이를 지켜본 사진작가 백종하씨는 고인이 종정에게 “지금 제 인생은 덤으로 사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사는 인생이 참 좋습니다”는 얘기를 했다고 전했다.

 정진석 추기경과의 인연은 발병 전인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자신 한 해에 책 한 권을 꼭 쓸 만큼 왕성한 저술가이기도 한 추기경 역시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고인을 각별하게 대했다고 한다. 이례적으로 고인의 부인 황정숙씨와 함께 만나 식사를 함께하기도 했다.

 병이 들자 고인은 추기경에게 “신부님, 성체가 고파요”라는 말을 하곤 했다고 한다. 배 고플 때 밥을 찾는 것처럼 자신에게 신앙의 힘이 절실하게 필요함을 그렇게 표현했다는 것이다. 신앙에 의지해 죽음을 마주한 절대 고독, 가라앉지 않는 병마의 고통을 넘으려 했다는 것이다.

 병세가 심상치 않자 고인은 23일 정진석 추기경에게 병자성사(病者聖事·사제가 병이 깊은 신자의 고통을 덜어주고 구원을 빌어주는 의식)를 부탁했다. 임박한 죽음에 대비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추기경을 만난 고인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투병 이후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미소였다는 것이다. 고인은 그렇게 생의 마지막을 준비했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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