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여성 교육(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4)-서은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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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졸업은 결혼>
1913년 내가 이화 학당에 입학할 때는 한 반 학생이 48명이었으나 정작 졸업할 때는 10명만이 남았다. 나머지 30명은 대부분 결혼하기 위해 중도에 퇴학했다.
나와 인천 영화 여학교 동창생으로 이화에도 함께 입학했던 김「루시」는 부모가 좋은 혼처가 났다고 데려가는 바람에 2년만에 퇴학했다.「루시」는 고향에 내려가기 전날 밤 밤새도록 나를 붙잡고 눈이 퉁퉁 부어 오르게 울었던 일이 생각난다. 다른 중퇴학생들도 겨우 얼굴이나 익힐까말까한 정도의 짧은 학창생활을 하다 그만 둔 사람이 많았다.
함께 졸업한 10명 가운데는 현재 김보린(전 감리교 신학교 교장) 김메불 (가정생활) 오적륜(가정생활)등 4, 5명만이 호호백발의 할머니로 살아있을 뿐 나머지 동창들은 그새 너무 소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모두 하늘나라에 가신 모양이다.
중도퇴학생이 하도 늘자 당시 총독부는 퇴학학생을 막기 위해 『퇴학생은 본인이나 보증인이 학비를 반납해야한다』는 규정을 정했었으나, 이 규정이 퇴학생을 막기보다는 입학희망자를 줄인다는 모든 학교의 반대로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그 때만해도 학생들의 학비를 총독부나 재단에서 많이 대어 주었기 때문에 그런 엄포를 놓았으나 그 뒤 자연히 사문화 했다. 중퇴자가 많았던 것은 역시 당시의 조혼풍습에 가장 큰 원인이 있었다.
앞서 말한 김「루시」도 15세 때 머리를 얹었고 대부분의 가장이 처녀가 16세면 으례 사위 감을 고르기 시작했으며 16세면 과년한 처녀로 손가락질을 했다.
그러나 새 문화의 영향을 받은 학생들은 조혼문제를 조급히 생각하지 않았고 삼·일운동 이후에는 조혼풍습도 많이 없어졌다.
초창기에는 결혼 여부를 가릴 수 없을 정도로 학생모집이 어려워 기혼자도 입학의 제한을 받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기숙사의 공동생활이 어려워질 염려와 미혼 학생에게 미치는 영향 등을 고려해서 될 수 있는 한 기혼여성을 받지 않았다.
우리 동급 반에는 1명의 기혼자도 없었으나 상급반에는 한두 명이 있었다고 들었다.
이들 기혼자들에게는 통학이 허용됐다. 기혼여성을 받지 않기로 학칙규정을 둔 것은 3O년대인 것 같다.
중등과 3회 졸업생 황애덕 선배 (75·중앙여고 황신덕 이사장의 언니)에 따르면 당시에는『졸업은 결혼이다』라는 유행어가 있었다한다.
말은 8,9세 된 학생이 입학하면 초등·중등 과정까지 거의 10년 안팍을 학교에 머무르다가 결혼할 때가 되어야 졸업하는 것이 예사였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이화 중등과 1회 졸업생 가운데 박경숙씨는 11세에 입학, 20세에 졸업했고 최활난씨는 12세에 입학해서 20세에 졸업했다. 이화 졸업증서 제1호인 최활난씨의 본명은 고 길활난 총장 이름과 똑같은 김활난인데 남편의 성이 최씨이기 때문에「미시즈·최」라는 서양식 이름으로 불리다가 아주 최씨로 성을 갈았다.
최 선배는 내가 다닐대 수학을 담당한 가장 인기 있던 선생으로 19l0년「매이·데이」행사 때는 「스큐랜튼」당장에 이어 제2대 「메이·퀸」으로 뽑힌 관록이 있다.
처음「메이·퀸」에는 학생들을 뽑지 않고 선교사나 선생 가운데서 뽑았는데 고 김활난 선배가 대학과 4학년 때인 1917년 학생으로서는 처음으로 제3대「메이·퀸」으로 뽑혔다.
남편의 성을 따른 예는 이화학당 재단이사였던 양규삼씨(납북)와 결혼한 김우륜선배(중등과 3회 졸·전도사업)가 성을 양씨로 .바꾸는 등 흔히 볼 수 있었다.
이화에서 현재 「피아노」실기 담당 부교수로 있는 최규선씨는 최활난 선배의 딸이다.
여학교가 처음 생길 때는 방학제도가 없었다.
단지 반 선교소요·청일전쟁·전염병창궐 (1908년)등 이유로 휴학을 했다는 기록은 있으나 학생을 모집하기 어려웠다는 이유로 탈락을 막기 위해 방학을 두지 않고 외출을 금했었다.
시국변동으로 인한 휴학 때에도 수업을 중지하고 가끔 집으로 보내 주었을 뿐 기숙사 생활은 계속했다 한다.
내가 다닐 때는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등 정규방학과 김장방학이라는 색다른 방학이 있었다.
여름방학은 6월부터 8월까지 3개월 동안이었고 겨울방학은 12월 20일부터 1월말까지였다.
김장방학은 11월중 약1주일 동안이었는데 이 동안은 모든 학생이 기숙사에 모여 겨울동안의 기숙사용 김장을 담갔다.
처음 김치를 담가보는 학생들이 배추줄기에 속을 싸서 쌈을 해먹는 일이 많아 사감이 일일이 감시하기도 했고 그러나 서로 눈 짓 신호를 보내며 몰래 먹던 기억이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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