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아무리 지지고 볶아도 가족은 힘입니다 … 내 곁에 있으니까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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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일러스트=강일구]

“부모님 제삿날이라도 알 수 있게 돼 이제야 자식의 도리를 다할 수 있게 됐습니다.”

 오는 25일 남북 이산가족 상봉 예정자 명단에 포함된 실향민들이 입을 모아 했다는 말이다. 살아있는 가족의 상봉만큼이나 돌아가신 부모의 제삿날 파악을 소중하게 여기는 심정이 엿보인다. 한민족이라면 대부분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다. 기일에 맞춘 제사와 설날과 추석에 지내는 차례는 명절 귀향과 더불어 한국인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풍속이기 때문이리라. 17년 전 영국 런던에서 1년간 연수할 당시 제사와 차례 때면 과일과 술로 간단한 상을 준비하고 한국에 국제전화를 걸어 시간을 맞춰 절을 올렸다. 제사와 차례를 병적으로 챙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알고 보니 이렇게 하는 교민이 제법 있었다.

 아련한 옛 기억 위로 얼마 전에 들은 친한 후배의 사연이 오버랩됐다. “저희 집은 제사와 차례를 더 이상 지내지 않아요. 지난해 오빠가 결혼하면서 어머니가 ‘내가 몇십 년 동안 했으면 됐지 며느리에게까지는 물려주고 싶지 않다’며 그만 지내자고 하시더라고요.” 유학자 집안 출신의 아버지도 조용히 결정에 따랐다고 한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세상이 이렇게까지 바뀌다니’ 싶어 충격이 컸다. 하지만 받아들일 순 없어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 제수를 준비하는 집안 안주인이 이런 결정을 하면 다른 식구들은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 주변을 보면 며느리들이 직장이나 자녀 교육 때문에 가례를 도울 수 없어 시어머니가 도맡는 집안이 적지 않다. 이런 집안은 시어머니가 기력이 떨어지거나 요양병원에라도 가게 되면 제사와 차례를 중지하기 십상이다.

 여기에 결혼 30주년, 40주년을 맞아 이제 제사와 차례는 그만 지내겠다고 선언하는 안주인도 제법 나오는 모양이다. 집안 어른의 친구분은 명절이면 온 가족이 부산 해운대의 호텔에서 지내는데 그 집안도 여기에 해당한단다. 명절에 해외여행으로 공항이 갈수록 더 붐비고 있는 것도 이 같은 탈제사·탈차례 시대의 단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명절이 지겨워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론 제사와 차례를 중지했다는 선배 한 분도 떠오른다. 어려선 삼 형제가 때론 다투더라도 형제애가 돈독해졌지만 성인이 된 뒤론 명절에 모이기만 하면 음복한 뒤 가례 비용 문제로 싸워 만날수록 사이가 벌어졌다는 것이다.

 그래도 명절 귀향길은 여전히 붐빈다. 명절이면 가족이 그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변하는 건 가족 형태와 풍속일 뿐 ‘명절은 가족과 함께’라는 공식은 여전히 유효하지 싶다. 아무리 싸우고 다투고 갈등하고 긴장하고 토라져도 가족은 가족이고 명절은 명절이니까 말이다. 내일이 한가위다. 온 가족이 함께 못하더라도 마음만은 하나일 것이다.

채인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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