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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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국전에는 해마다 말썽이 따라다닌다. 국전이 그만큼 대단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인지. 그런 국전이 17일 열아홉번째로 열렸다.
올해에도 1천5백89점이나 되는 작품이 출품됐다. 이만하면 우선 국전의 위신은 선다. 심사 책임자의 말로는 예년보다 수준이 향상됐다니 더욱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국전의 수준이 향상됐다는 말처럼 허망한 것은 없다. 한 개인에게 있어서는 이런 말이 해당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한나라의 미술에 대해서도 과연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것일까?
해마다 수준이 올라갔다면 아직 우리네 미술계는 세계에 내놓을만한 것이 못 된다는 얘기가 된다.
참다운 예술품에는 [수준]이란 말이 해당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습작기에나 적용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가령 루벤스보다 마티스가 더 수준이 높다고도 말 할 수 없는 일이다. 수준이 문제되고 있는 동안은 아직 일정한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수준]의 국전을 자랑한다는 것은 꼭 아동미술전을 미술교사가 학부형에게 뽐내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국전은 우리 나라 미술계의 그해의 결정을 자랑하기 위한 것으로 알고있다. 그런 국전이 아직도 [수준]을 찾고 있는 것이라면 [국전]이라. 법석을 떤다는 것부터가 우습게 느껴지는 것이다. 『프란츠·하르스를 보면 그림을 그리고 싶어진다. 렘브란트를 보면 붓을 던지고 싶어진다』고 어느 미술가가 말한 적이 있다.
프란츠·하르스는 당시의 2류 인기화가였다. 그 정도는 누구나 그릴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던 것이다.
해마다 국전에 출품작이 많은 것도 렘브란트가 아니라 프란츠·하르스 정도의 입선작들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니 출품작의 수를 자랑할 것은 못된다.
올해에는 또 학생출품작이 심사에서 제외 됐다해서 말썽이 있었다. 학생들의 입선이 압도적이라 해서 국전의 권위가 떨어질까 염려하는 것처럼 옹졸한 생각은 없을 것이다. 학생들의 작품을 경원하면 국전의 권위가 올라가려니 생각하는 것도 우스운 얘기다. 만일에 파벌다툼을 피하기 위해서였다면 더욱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국전의 권위는 국전운영자와 심사위원들이 떨어뜨려 놓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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