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정 허경란 교수와 함께하는 동양고전 모임 눈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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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학연구원 회원들은 동양고전을 통해 인문학의 지혜를 탄탄히 다지고 있다. 사진은 실제 수업 모습.

“삶의 실체가 없는 상태에서 인문학을 논하는 일은 대단히 위태로운 일입니다. 책을 읽지 않으면 무지하지만 책만 읽는다고 해서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을 시끄럽게 할 수 있습니다. 삶이 아는 것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문학은 곧 생활입니다.” ‘찾아가는 인문학’ ‘인문학적 상상력’ ‘꽃보다 인문학’ 등 어느새 하나의 키워드로 자리 잡은 인문학 열풍 속에서 오랫동안 동양고전을 통해 인문학을 다져온 천안 지역의 모임이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 4일 오전 11시 천안시 동남구 용곡동의 예학연구원(자택)에는 월정 허경란(60) 교수와 그의 제자들이 맑게 우려낸 차를 마주하고 앉아 경건한 마음으로 책을 펼쳐 들었다. 옛 교육기관인 서당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베어있는 이곳에서는 이날 ‘인문학으로 생활하라’라는 주제로 공부가 시작됐다. 동양고전을 이해하는 기본이 되는 천자문과 주역의 설명이 이어진 이날 시간에는 공부를 시작한지 이제 한달 된 주부부터 동양고전에 빠져 10년 넘게 공부하고 있다는 사업가, 전문 교수, 항공사 부기장, 일반 회사원까지 20여 명의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소리 내며 책을 따라 읽었다.

 오랫동안 예학과 한학, 다도를 공부했다는 허 교수는 이날 다양한 직업군을 가진 제자들에게 동양고전인 주역과 논어를 비롯, 자연과 시간, 공간의 관계성에 따라 나타나는 오묘한 세상사를 이해하기 쉽게 풀이해 설명함으로써 제자들이 자연의 법칙에 보다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했다.

 허 교수는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바탕으로 인간의 생명활동 역시 자연현상으로 바라봐야 하며 이때 인문학은 삶의 시간을 각자 주어진 역할에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길을 찾도록 하는데 그 뜻을 두고 있다고 강조했다.

 “인문학의 중요성이 부각될수록 현실에서 인문학을 배우고 실천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는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고, 빠름이 미덕이 되어 버린 디지털 시대에서 서양의 과학처럼 분명하게 당장 드러나는 공부가 아니기 때문이죠. 예학연구원의 회원들은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명상을 하며 인문학의 언어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은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실제 예학연구원 회원들은 인문학을 머릿속에 저장하고 외워야 하는 어려운 학문이 아니라 스스로 실천할 수 있도록 친근하게 다가가는 학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모임의 최고참이자 맏형격인 전병탁(60)씨는 공부를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서울에서 천안을 오가고 있다. 젊은 시절부터 관심을 갖게 돼 주역과 고전을 배워 왔다는 정씨는 좀 더 깊이 있게 배울 수 있는 스승을 찾다가 허 교수를 만나 10여 년이 넘도록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고 전했다.

 정씨는 “동양고전을 배우며 삶의 자세가 달라졌다”며 “정신적 빈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공부를 해 왔었는데 동양고전은 내가 머문 자리와 시간에 대한 자세를 생각하며 올곧은 마음으로 정신이 일관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자연스럽게 삶의 목표가 생기며 사람들과의 관계까지 달라지는 것을 느끼고 경험했다”고 강조했다.

 라은미(46)씨는 “인문학이라 하면 보통 문학과 역사, 철학을 말하지만 주역을 바탕으로 하는 공부는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알게 해준다”며 “월정 선생님과 함께하는 동양고전은 서양의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부분까지 명쾌하게 대적할 수 있어 공부를 하는 동안 자부심을 느끼게 된다”고 설명했다.

 회원들은 “인생을 살면서 느끼는 고민과 유혹을 모두 물리칠 수는 없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내 자리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학문이 바로 인문학”이라며 “살다 보면 흔들리고 아픈 일들이 많지만 인문학을 통해 사람의 도리를 살피고 중심을 잡아 최악의 상황을 피해갈 수 있는 현명한 지혜를 얻는다”고 입을 모았다.

 허 교수는 공부를 한다는 것은 곧 생활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강조했다.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고 삶을 알지 못한 채 사는 것은 위태롭기 그지없는 삶입니다. 하지만 인(仁)이라 일컫는 삶의 가치를 실천하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죠. 인문학을 생활에서 실천해 보편적인 삶의 가치를 알았을 때 이기심을 극복할 수 있고 삶의 근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요.”

 한편, 예학연구원 인문학당은 월요반(매주 월요일 오후 7시30분~9시30분)과 수요반(매주 수요일 오전 10~12시)으로 진행되고 있다.

글·사진=홍정선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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