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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미 채터누거·타임스지 발행인 골든 여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신문을 위해 태어났고 신문을 위해 삶을 바치고있는 여성』-.
이 말은 바로 미국 테네시주에 있는 채터누거·타임스지의 발행인 루드·설즈버거·골든 여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신문인의 가정에서 태어나 신문과 함께 성장해온 골든 여사는 그녀의 조부가 일으킨 뉴요크·타임스지와 함께 채터누거·타임스지를 미국에서 손꼽히는 일류지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뉴요크·타임스 발행인설도>
그녀의 할아버지 아돌프·오크스는 초라하기 한이 없는 채터누거지를 사서 사옥을 다시 짓고 유능한 인재를 뽑아 정말 신문다운 신문으로 면목을 일신시켰고 그후 1896년 오늘의 뉴요크·타임스를 인수하여 명실상부한 신문인이 됐다.
그녀의 아버지 아더·헤이즈·설즈버거는 뉴요크·타임스의 발행인으로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현재는 그녀의 남동생 아더·펀치·설즈버거가 뉴요크·타임스를 맡고있다.
이런 관계로 뉴요크·타임스지와 채터누커·타임스지는 서로 그 성격면에서나 보수적인 레이·아웃 방법에서나 매우 흡사하다.
그래서 뉴요크·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이며 워싱턴 주재 지국장인 제임즈·레스턴이 처음으로 채터누거·타임스지를 보고는 『뉴요크·타임스보다 더 닮은 뉴요크·타임스지가 또 있구나』라고 소리쳤다는 에피소드까지 생겨났었다.
골든 여사는 l964년 정식으로 채터누거·타임스지의 발행인이 됐다. 대학시절부터 신문에 관심이 깊었던 그녀는 여름방학만 되면 스미드·칼리지의 기숙사를 나와 뉴요크에 있는 뉴요크·타임스지의 사무실에 기거하면서 신문제작을 도왔으며 발행인이 되기 전까지는 PR에서부터 인사·음악평·중역의 일에 이르기까지 안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신문사의 전과정을 마스터한 『억척꾼』이기도 했다.
1963년 그녀의 형부인 오빌·드라이푸스가 사망하자 한때 그녀가 뉴요크·타임스사의 발행인이 될 것이라는 풍문이 유력하게 나돌았다.

<전통적으로 민주당 지지>
그때 그녀는 이 사실을 강력히 부인하고 이 풍설은 단순히 가십에 불과하며 발행인 자리는 그녀의 남동생이 차지해야 할 것이라고 설득시켜 끝내 동생에게 뉴요크·타임스지를 양보하고 자신은 남편 벤·헤일·골든과 이혼한 64년에야 비로소 남편이 갖고있던 채터누거지의 발행인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신문과 함께 잔뼈가 굵어온 그녀인 만큼 골든 여사는 신문의 사설에서부터 광고에 이르는 모든 정책을 손수 지휘하고있다.
설즈버거가의 신문인 뉴요크·타임스지와 채터누거·타임스지는 모두 민주당을 지지하는 자유주의 경향을 띠고 있다. 이것은 그녀의 조부가 민주당원이었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하여간 선거 때는 으례 민주당후보를 지지하는 것이 통례였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 아더·헤이즈·설즈버거가 발행인으로 있던 1940년 선거 때는 이 양지의 사설에 이변이 일어났다.
당시 대통령선거는 공화당의 웬들·윌키후보와 민주당의 루스벨트후보의 대결이었는데 양지는 모두 윌키후보를 지지했다.

<한때는 루스벨트에 반기>
30년대 후반기의 대공황을 타파하기 위해 유명한 TVA사업을 추진했던 루스벨트 대통령을 제쳐놓고 뉴·딜정책에 반대하여 사유전력회사의 권익을 옹호하고 있는 윌키후보를 지지한다는 것은 도저히 당시 형편으로는 납득이 안가는 처사였다.
더욱 TVA사업과 직접 이해관계를 갖고있는 테네시주에서 그곳에서 발행되는 신문이 루스벨트에 반기를 들고일어난다는 것은 상식이하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설즈버거는 뉴요크에 이로운 것은 결국 테네시에도 이롭다는 그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후 44년 선거에서도 공화당의 존·듀이 후보를 지지했고 52년, 작년에도 아이젠하워를 지지했다.
채터누거와 같은 중소도시에서 조석간신문이 갖는 경쟁은 치열하다.
특히 경영주가 분리돼있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경쟁지와 싸움서 벌금 물고>
채터누거시에는 골든의 타임스지와 석간지인 뉴스·프리·프레스지가 비교적 긴밀한 유대관계 밑에서 공동인쇄 및 관리까지 했다. 그러나 66년 뉴스·프리·프레스지가 『자주노선』을 선언하고 공동전선에서 이탈하자 이 두 신문은 치열한 경쟁을 벌이기 시작, 채터누거·타임스가 석간지인 채터누거·포스트를 새로 발간하자 뉴스·프리·프레스는 일요판을 발간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두 신문의 경쟁은 신문계에 큰 화제가 됐고 결국 법무성에까지 번져 새로 창간된 포스트지가 경쟁지인 뉴스·프리·프레스를 제거키 위해 발간된 것이라는 통고를 받았다.
이러한 결정에 골든 여사는 심한 반발을 느꼈으나 이 문제를 다시 법정에 끌고 가면 적어도 4, 5년의 기간이 걸릴 것을 참작, 정부의 결정에 굴복하고 2천1백만달러의 벌과금을 물기까지했다. 타임스지의 음악평을 쓴 일이 있을 정도로 오페라를 좋아하고 있는 골든 여사도 뉴스·프리·프레스지와의 『생존경쟁』을 위한 진흙싸움에는 완전히 실망해 버렸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여사는 『양질의 신문을 발행하지 못할 바에야 언론에서 손을 떼겠다』고 대기염을 토할 정도로 의욕에 넘쳐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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