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Report] 펀드매니저 믿느니 … 차라리 너를 믿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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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사업가 박모씨는 몇 달 전 PB(자산가를 대상으로 자산운용 서비스를 해주는 사람)로부터 시스템 매매 전문 투자자문사를 소개받았다. 투자자문사 측은 “약세장에서도 수익을 낼 수 있는 파생시장에 자산의 일부를 투자하되 그 방식을 컴퓨터 자동 매매를 이용하는 것”이라며 매매 프로그램 몇 개를 추천하고 최근 코스피200선물 지수 데이터를 활용한 시뮬레이션 결과도 보여줬다. 박씨는 PB가 근무하는 증권사에 파생상품 거래 계좌를 만든 뒤 투자자문사와 투자계약서를 쓰고 2개 프로그램에 각각 1억원씩을 투자 중이다. 그는 “투자자문사나 자산운용사의 펀드매니저에게 맡긴 돈이 코스피 수익률도 못 따라가는 경우가 자주 있는데 시스템 매매에 투자한 돈은 지금까지 누적 수익률이 20% 가까이 된다”며 “수익의 30% 정도로 투자자문사에 수수료로 주지만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

 강남을 중심으로 고액 자산가들 사이에서 시스템 매매 투자가 퍼지고 있다. 주식 시장이 횡보세를 보이면서 주식 투자로 돈 벌었다는 사람을 찾기 힘들어지자 대안 투자법으로 시스템 매매가 주목받는 것이다.

 시스템 매매는 컴퓨터를 이용해 각종 데이터와 주가 추이 등을 활용, 투자 원칙을 짠 뒤 자동 매매하는 방식을 뜻한다. 사람의 개입을 완전히 배제한 채 컴퓨터만으로 전략에서부터 매매까지의 전 과정을 수행한다. 오를 땐 주가가 더 오르지 않을까, 떨어질 땐 반등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 매도 시점을 놓치는 일이 줄어든다는 게 장점이다. 사람이 알아차리기 전에 가격에 선(先) 반영되는 요소들을 투자에 활용할 수 있는 것도 장점으로 꼽힌다.

 미국에선 시스템 매매 기법으로 운용되는 헤지펀드가 있을 정도로 발달한 투자 기법이다. 특히 주식시장에 비해 변동성이 크고, 주식시장과 달리 약세장에서도 매수·매도 포지션을 활용해 수익을 낼 수 있는 파생시장에서 많이 쓰인다. 미국 선물운용사에선 10번 중 7번 이상을 시스템 매매를 통해 거래하는 경우가 전체의 67%를 차지하고 있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다. 최고 수익률을 내는 펀드 상위 30개 중 10개는 100% 시스템 거래만으로 운영된다고 한다.

 증권업계에선 국내에 시스템 매매가 처음 들어온 시기를 1996년으로 본다. 선물시장이 개장하면서 미 시카고선물시장 연수단 등을 통해 시스템 매매 기법이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시스템 매매가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건 2008년이다. 세계 금융위기 당시 주식 투자자 대부분이 큰 손실을 봤지만 시스템 매매를 활용해 파생상품 시장에서 큰돈을 번 이들이 나타난 것이다. 인터넷 닉네임 ‘알바스트로’로 더 유명한 성필규 PK투자자문 회장, 주식 투자로 이름을 알린 뒤 시스템 매매로 돌아선 권정태 포스랩 대표가 그들이다. 하지만 지난해 3월 코스피200 옵션 승수 인상 같은 정부 규제로 파생상품 시장 자체가 위축되면서 시스템 매매 역시 사그라들었다. 상황이 달라진 건 올해 초부터다. 주식 시장이 박스권에 갇히면서 저금리 기조 속에서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던 자산가들이 파생상품 시스템 매매에 다시 눈길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고액자산가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면서 전문 투자자문업체도 생기고 있다. 현재 설립된 시스템 매매 전문 투자자문사만 10여 곳에 이르고, 이 중 30~40% 정도는 운용 규모가 1000억원대에 달한다. ‘압구정 미꾸라지’로 유명한 윤강로 회장이 이끄는 KR선물과 에이스투자자문·PK투자자문·포스랩이 대표 업체로 꼽힌다.

 자산가들 중심으로 시스템 매매가 빠르게 확산된 데엔 보유 주식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도 작용한다. 정문재 하이투자증권 교대역지점 부장은 “주가가 지지부진해 보유 주식을 팔지 못하는 자산가들이 주식을 증거금으로 밑천 삼아 시스템 매매에 나서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매매 프로그램을 직접 만들어 인터넷에 공개, 투자자를 모집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다. 지난해 증권사를 그만두고 시스템 매매 전문 투자가로 전업한 A씨가 그런 경우다. A씨는 “비슷한 상황의 전업 투자자들이 모이는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주로 정보를 얻는다”며 “매매 프로그램을 빌려주고 월 10만~30만원의 사용료를 받거나 투자자로부터 자금을 위탁 받아 프로그램을 활용해 직접 운영해줄 생각”이라고 말했다. 시스템 매매 상품 판매로 유명한 우리투자증권 S&G센터의 김성신 센터장은 “개발자들이 자신이 만든 프로그램을 투자자에게 소개해달라며 거의 매일 찾아온다”고 말했다.

 ETF(상장지수펀드)를 자동으로 매매하는 시스템 매매도 인기다. 우리투자증권의 ‘스마트인베스터’의 경우 약정금이 전년 대비 90% 증가했다.

 투자 수요가 각기 다른 몇몇 사람이 투자금을 나눠 내고 수익과 손실을 공유하는 형태의 투자도 생겨났다. 한 사람이 1억원의 종잣돈을 내고 또 다른 한 사람이 1000만원을 내 총 1억1000만원의 투자금을 마련했다고 치자. 매매 프로그램 운용자는 손절매 기준을 1억원으로 설정, 종잣돈 투자자에겐 원금을 보장해주는 대신 수익이 크게 나더라도 연 6~7% 수준의 수익만 제공한다. 1000만원 투자자는 최악의 경우 원금을 모두 잃을 수도 있지만 6~7% 이상의 추가 수익률은 모두 가져간다.

 그러나 유념해야 할 점이 있다. 김성신 센터장은 “아무리 손절매 시점을 설정한다고 해도 시장이 급락하거나 급등하면 매매 자체가 체결되지 않는다”며 “이럴 경우 초단타매매기법까지 활용하면 불과 5분 사이에 엄청난 손실을 볼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9·11 테러 같은 돌발 변수가 발생할 경우 시스템 매매로는 적절히 대응할 수 없다는 것도 단점이다. 허남권 신영자산운용 자산운용본부장은 “시스템 매매론 수익을 낼 수 없을 경우가 많다. 시장 상황에 맞춰서 적절히 활용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시스템 매매 투자는 사인 간의 투자 계약에 근거해 이뤄지는 만큼 법적으로 문제될 것은 없다. 위험성이 있는 만큼 잘 따져 투자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정선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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