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그뉴」의 놀라운 성공(상)「아더·슐레징거」가 본 그 인간과 성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닉슨」미대통령이「닉슨·독트린」을 발표한지 1년 남짓한 24일,『「닉슨·독트린」의 적용정도와 그 영향』을 현지조사하기 위해「스피로·T·애그뉴」미 부통령(52)이 아주 4개국 방문 첫 기착지로 한국에 왔다.「애그뉴」부통령은 반전 파. 학계, 지식인, 언론계의 비위를 거슬리는 직선적 발언으로 심심찮게「매스컴」에 오르내렸다. 미국의 석학·저술가인 「아더·M·슐레징거」교수(54)가『「애그뉴」의 놀라운 성공』이라는 제 하로「뉴요크·타임스」에 기고한 글을 통해(초역)「애그뉴」의 면모를 살펴본다. 【편집자】
『「애그뉴」현상』이란 말이 나올 만큼「애그뉴」부통령은 밀려오는 파도의 세력처럼 그의 독특한 개성과「이미지」로 미국을 풍미하고 있다.
오늘날 한낱 하관말단의 벼슬아치에서 일약『가공할 정치인』이 된「애그뉴」의 눈부신 성공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 그의 개성이 풍기는 보이지 않는 힘, 그의 연설이 일으키는 충격과 ,당을 위한 모금을 하는데 그의 손만 대면 모든 것이 금으로 변하는「마이다스」왕 같은 재능, 친구를 무한히 즐겁게 하는 반면 정당들을 격양시키고 언론을 당혹케 하는 그의 드문 재주 등이 모든 것을 의심 할 사람은 없다.
부통령에 취임한지 16개월, 도대체 이 사실은 모두 무엇을 의미하는가?『「애그뉴」현상』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일반 미국 민의 애국심, 숨겨진 부만의 용솟음이다. 그것도 독특한 인물을 통해 분류처럼 솟아 흐르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 인물을 연구하는 일을 하는데 가장 적합하지 못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68년 선거 때「닉슨·애그뉴」「티키트」를 반대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가의 할 일 이라면 사실들이 왜 이러하냐를 구명하는데 있다.
나는「애그뉴」부통령과 절친하지도 않다. 나는 그의 연세·성명·「인터뷰」등을 치밀히 연구한 끝에 이 글을 쓴다.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은「애그뉴」부통령이 전혀 정치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국내정치-경제·예산·복지계획 등-와 특히 외교정책에 대해서 그는 권태마저 느낄 정도이다.
지난1월「닉슨·독트린」을 설명하기 위해「아시아」를 순방한일은「애그뉴」부통령 자신에게는 사실 신명나는 일이 아니었다.
「애그뉴」부통령은 모든 정책의 골칫거리를 부통령이 떠맡은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그가 이런 골칫거리 문제들에 자발적으로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가 관심을 갖고 있는 영역은 다른 문제들이다.
「애그뉴」부통령이 영웅으로든「두목」으로든 간에 일약 세인의 관심을 끌만큼 등장한 것은 정치- 말하자면 예산투쟁·복지계획 등의 투쟁에서가 아니라 문화적 정치, 즉 인생양식의 전장에서이다.
「닉슨」대통령이「애그뉴」를 택하면서『이 사람에게는 비방이 있다』고 말했을 때 아마 「카리스마」적 자질을 의미했을 것이다.
「닉슨」대통령은 물론 대 남부지방 선거 전략의 하나로「애그뉴」「메릴랜드」지사를 선택했지만「닉슨」은「애그뉴」란 인물 속에 이른바『망각된 미국인들』을 대표하는 화신을 찾아낸 것이다.
「닉슨」대통령은 선거유세에서『망각된 미국인들은 끝내 분노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이들은 미국을 사랑하며 지금 미국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증오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하곤 했다.
「애그뉴」도「닉슨」처럼 전형적인 미국인이다. 그는 가부의 도움이나 일류 대학출신과 같은 사회적 지위 없이 성공한 사람이다.
「그리스」에서 이민해온 아버지를 가진 어린「애그뉴」는 30년대의 대 공황 속에서 자랐다. 대학을 그만두고 군 문에 뛰어들어 전쟁을 겪었다. 그런 다음 야간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그에게 편안한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보험회사의 배상청구 조정자로도 일했으며「슈머·마키트」의 부인 사「매니저」로도 일했다. 이때가 30전후, 그러나 주 방위 임무에 소집되었다. 한국전 때문이었다. 한국전이 끝난 후 그는 다시 법률 계로 돌아가 간신히 발판을 굳혔다. 이때부터 그는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