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에 협조권유…국세청 동원 안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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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회실은 다소 어두웠다. 두꺼운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이석희씨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아래 위 주홍색 죄수복 차림의 미결수 李씨는 구치소에서 가장 오래된 수감자 중 한 사람이라고 했다.

-어떻게 지내나.

"매일 후회와 반성으로 보내고 있다. 주변 사람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치기도 하고 독서나 사군자 그리기 등으로 소일한다."

-1997년 8월 당시 서상목 한나라당 의원에게서 '국세청이 기업들에 압력을 행사해 대선자금을 마련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나.

"고교 동문들 모임에 동석한 徐전의원이 '당 후원회 기업들이 후원금을 잘 내지 않아 자금사정이 어렵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은 후 기업인들을 만나면 그런 사정을 얘기하고 '도와야 되지 않겠나'라고 권했다. 다들 평소에 가깝던 사람들이라 압력으로 받아들일 분위기가 아니었다."

-검찰은 徐전의원의 요청에 따라 李씨가 당시 임채주 국세청장 등과 논의해 대상 기업 리스트를 만들고 林청장과 李씨가 나누어 돈을 거두었다고 발표했는데.

"한마디로 세풍은 없었다. 첫째, 국세청 조직을 동원한 적이 없다. 둘째, 청장이나 조사국장 등과 대선자금 조성에 관해 협의하지도 않았다. 셋째, 여당으로부터 자금 지원 요청을 받은 사실도 없다. 넷째, 徐의원과 개인적 친분이 있는 것을 알고 기업인들이 자금전달 요청을 해온 경우에 심부름을 한 것이다. 더구나 그 기업인들도 대부분 개인적으로 가깝던 사람들이었다."

-林전청장은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인가.

"徐의원이 도와달라는 일이 있다고 상의는 했다. 林전청장은 '소개는 해 주더라도 직접 전달은 하지 말라'고 조언했을 뿐이다. 현명한 조언이었다. 그런데도 내가 일부 직접 전달하기도 해 결국 물의를 빚었다. 정말 미안하다."

-집 압수수색에서 발견된 1백대 기업 리스트는 기업을 압박한 근거자료가 아닌가.

"국세청이 일하는 관행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국세청은 업무 참고용으로 매년 1백대 기업에 대해 경영상황 등 참고자료를 만든다. 그 리스트를 사무실에 두었다가 언론에라도 누출될 경우 세무조사 운운하며 공연한 오해를 낳을 것을 우려해 집에 두었던 것이다."

-어쨌든 대선자금을 모은 건 사실 아닌가. 얼마나 모았나.

"액수는 일일이 기억나지 않는다. 또 대부분 소개만 해 주었기 때문에 어느 기업이 얼마를 어떻게 전달했는지는 다 알 수도 없다."

-검찰은 1백67억원, 徐전의원은 10억원 정도라고 주장하는데.

"徐전의원 주장 쪽이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나와 상관없이 한나라당 후원회 기업들이 영수증을 받고 후원금을 낸 것까지 마치 내가 모은 것처럼 부풀려진 것이 아닐까 싶다. "

-이회창 총재를 만나거나 연락한 적이 있나.

"없다."

-98년 8월 무슨 얘기를 들었기에 미국으로 도피하게 됐나.

"한나라당 대선자금과 관련, 계좌 추적이 시작됐다는 소리를 들었다. 처음에는 일이 이렇게 커질 줄 모르고 대학 강의 준비 자료를 챙겨 절에 들어갔었다. 그러다가 한나라당 대선자금 전체에 관한 조사도 할지 모르겠고, 정권이 바뀌면 선거에서 진 쪽의 일을 침소봉대하는 과거 관행에도 생각이 미쳐 '일단 피해있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간 변호사 비용 등이 큰 부담이었을텐데 돈은 어떻게 마련했나.

"미국에 셋째 형이 산다. 마취전문의로 성공했다. 그 형이 '집을 팔아서라도 도울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한나라당 쪽에서 아무런 연락이 없었나.

"없었다."

-그 밖의 연락은 없었나.

"평소 친분이 있던 당시 이종찬 국정원장에게서 두차례 전화연락이 있었다.'네가 엄청난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네가 여기 없어 과대 포장되는 것 같으니 빨리 진실을 밝히는 것이 낫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그저 '알았다'고만 했더니 자기를 못 믿겠으면 김태정 검찰총장에게 연락하도록 하겠다고 하더라. 金총장은 '나 있을 때 와라''절대 불리하지 않게 하겠다'고 연락해왔다. 그때도 '알았다'고만 했다. 이 분들과 내가 친분이 있는 걸 아는 사람들이 많다. 혹시 나를 도와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오해를 받을 수 있는 분들이다. 그래서 일부러 이분들의 전화는 내가 직접 받았다. 국제전화니 도청이 되면 이분들이 나를 도와주기는커녕 내 조기 귀국을 설득하고 있다는 걸 알릴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했다."

-재판은 어떻게 돼 가나.

"지난해 2월 중순부터 시작된 재판에서 28개 항목의 기소내용 중 절반은 기각됐다. 그러나 지난해 8월 말 재판 이후 6개월이 지나도록 아무런 판결이 내려지지 않고 있다. 2월 14일 조기판결 신청서를 제출하면서 보석 신청도 했다."

-조기 판결이 나면.

"항소 포기를 조건으로 조기 송환을 요청할 생각이다. 새 정부 하에서 공정한 심판을 받아 응분의 죄값을 치르겠다."

화이트 클라우드=김정수 특파원

<사진설명>
이석희 전 국세청 차장이 미결수로 수감돼있는 미국 미시간주 화이트 클라우드시의 뉴웨이고 구치소. 李씨는 구치소에서 자동차로 약 세 시간 거리인 에키모스시의 반지하 아파트에서 1년 전 체포돼 이곳 구치소에 수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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