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글로벌 아이

제국 의식과 변방 인식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이상언
런던 특파원

‘제국의 환상이 마침내 깨졌다’. 영국 하원에서 지난달 29일 대(對)시리아 군사 개입 동의안이 부결되자 일간지 가디언에 이런 제목의 글이 실렸다. 역사가 아널드 토인비의 손녀인 이 신문의 간판 칼럼니스트 폴리 토인비는 “우리는 이제 그다지 강하지 않고, 전처럼 부자가 아니며, 숱한 전쟁에 지쳤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더 이상의 허세는 곤란하다”고 썼다.

 영국 의회가 정부의 전쟁 동의를 거부한 것은 231년 만의 일이었다. 20세기 중반까지도 수십 곳에서 식민지를 거느렸던 이 나라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더불어 세계 질서를 유지하는 글로벌 경찰 국가를 자임해 왔다. 한국전쟁에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보냈고, 2001년 아프가니스탄과 2003년 이라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99년 코소보 공습 때는 미국보다 적극적이었다.

 영국은 가난한 나라를 돕는 공적개발원조(ODA)에도 미국 다음으로 많이 기여해 왔는데, 경제 규모를 고려하면 미국보다도 큰손이다. 지난해의 경우 국민총소득(GNI)의 0.56%(미국은 0.19%)를 원조로 제공했다. 한국의 수치는 0.14%다.

 이 나라의 국민은 국제 문제에 관심이 많다. 엠네스티 인터내셔널·세계야생동물기금(WWF)·옥스팜 등 국제적 인권·동물·빈민 보호 단체들이 즐비하다. 2011년 일본의 쓰나미 사태 때는 시골 작은 교회에서도 모금 운동이 벌어졌다. 언론에서 국제 뉴스가 차지하는 비중도 유달리 크다. 시청료로 운영되는 BBC 방송의 해외 근무 직원은 600명이 넘는다. 제국 운영의 관성과 습성으로밖에는 잘 해석이 안 된다.

 영국 정부는 70%가량의 국민이 시리아에 대한 무력 대응에 반대하자 당혹스러워 했다. 실업자가 늘고 복지도 축소되는 마당에 남의 나라 전쟁에 쓸 돈이 어디 있느냐는 반발이 거셌다. 낡은 핵잠수함 교체도 버거울 정도로 팍팍해진 경제 현실이 제국적 의식의 허상을 벗겨내는 중이다.

 폴리 토인비처럼 약해진 국력에 자학하는 영국인이 늘고 있지만 실상 영국은 그 제국적 허장성세의 덕을 많이 봤다. 경제력 면에서 비슷하거나 우위에 있는 프랑스나 독일보다 국제 사회에서의 발언권이 강했고, 그만큼 국익을 잘 챙길 수 있었다.

 영국과 반대로 한국은 국제 현안을 ‘강 건너 불’처럼 바라보는 경우가 꽤 있다. 한국에도 인권 단체들이 있지만 시리아 정부의 화학무기 사용 의혹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말과 행동이 없다. 정부는 외교부 대변인의 짤막한 논평으로 공식 입장 표명을 대체했다. 최근 이집트 군경의 시위 민간인 사살 사건에도 그랬다. 한국인 또는 한국 기업이 바로 피해를 보거나 경제에 타격을 주지 않는 한 큰 관심 거리가 아니다. 3년 전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를 개최하며 글로벌 리더 국가가 됐다고 선언한 한국, 아직도 변방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상언 런던 특파원